족보 없는 문중(門中)은 상상하기 힘들다. 족보에는 각 문중의 유래와 조상의 행적을 알 만한 내용이 많다. 족보는 중요하고 값진 기록물이다. 자기의 뿌리와 원천을 밝혀주는 전거(典據)이다. 각 문중의 가치관과 주장이 상당히 스며든 서책인지라, 각자는 제삼자로서 객관화해서 보려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왜 족보는 필요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중국 송나라의 정자(程子)와 소순(蘇洵)의 말씀에서 보인다. 청재(淸齋) 형기선(邢基善; 1932.03.14.-2012.12.27, 향년 81세:邢善基로 세상에 알려졌고, 가족관계등록부에 형선기로 등재됨) 선생님은 두 분의 말씀을 원용하여 족보의 서문을 지으셨다.

청재 선생님은 1957년 1월 당시 25세 청년으로 진주형씨(晉州邢氏) 병사공파(兵使公派)의 족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시점은 1950년 발발한 6·25사변의 정전이 이뤄진 1953년 7월 27일에서 불과 3년 6개월이 지난 때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전쟁 뒤끝이라 정신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견디기 힘든 시기였음은 자명하다. 굶주리고 헐벗고, 겨우 연명하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고난이었다. 이는 족보에 대한 병사공파 문중과 청재 선생님의 정성과 열정이 대단했음을 방증한다.

▲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청재 선생님은 군에서 제대한 지 2년 8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부터 집안의 어르신들을 도와 족보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6·25사변으로 전쟁이 한창 중인 1951년 5월에 입대하였다가 만 3년간 복무를 마치고 1954년 5월에 제대하였다. 군 복무 중 얻은 무릎 신경통으로 심신의 고통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그때 얻은 지병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통증을 견디시느라 남몰래 많이 고생하셨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은 청재 선생님이 족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자(程子)와 소순(蘇洵)의 말씀을 되새김했음을 보여준다.

청재 선생님이 지은 글의 원문과 음을 제시한 후 보통 사람이 잘 이해하고 친숙하도록 번역하여 풀이했다.

족보 서문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번역문>

사람은 씨족을 열고 족보를 잘 갖춰야 정이 두터워지고 화목해지는 이치가 선다. 이러한 이치를 거울삼아 보면, 누군들 족보를 갖추지 않으랴. 그런 까닭으로, 정자(程子)가 말씀하길,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를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해야 그 씨족이 이뤄진다.” 정녕코 정자께서 그렇게 말씀한 뜻을 느껴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살펴보니, 소순(蘇洵)이 말씀하길,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하고 일가친척 사이에 오가는 두텁고 화목한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더욱 그러한 뜻을 느껴 앎으로써 우리 형씨가 모두 저번 때에는 ‘길거리의 남’(로인; 路人)에 불과했던 사람과 더불어 서로 정성껏 바라보니, 씨족이 매우 흡족해하고 일가 간이 되었다. 그 씨족의 한 세대가 부지런하고 꾸준히 힘써서 족보를 만들면, 비록 백대가 떨어졌다 해도 성씨가 같은 사람끼리는 서로 나누는 두텁고 화목한 정이 자연스럽게 열리리니,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성씨인들 족보를 만드는 일이 어찌 중차대하지 않겠는가!

집안의 형인 형시억씨와 형시백씨, 아저씨인 형광열씨가 협력하여 이 족보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나에게 그 서사(書寫), 즉 옮겨 쓰는 임무를 맡겨주셔서 비록 졸필인데도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삼가 정서(正書), 즉 또박또박 바르게 글씨를 쓰면서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를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정서를 끝내고서 스스로 흥겨웠기에 위와 같이 생각을 나타내어 기록했다.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하는 마음과 일가친척 사이에 오가는 두텁고 화목한 정을 후손들이 서로 권하기를 원한다.

정유년 1957년 정월 열엿샛날 후손 형기선(邢基善) 삼가 쓰다.

 

정자(程子)는 보통 ‘2정자’(二程子)로 불리는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년)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년) 중 어느 한 분이다. 청재 선생님께서 원용한 정자의 말씀이 나오는 출처는 아래와 같다. 

“성(姓)과 본(本)이 같은 겨레붙이를 거두고 풍속을 두텁게 해야 그 씨족이 이뤄진다.” (收宗族厚風俗爲其氏族者)의 원문과 출처:

管攝天下人心 收宗族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世族與立宗子法

(관섭천하인심 수종족후풍속 사인불망본 수시명보계세족여립종자법)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이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거두며 종가(宗家)의 맏아들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

<이정유서, 권6>(二程遺書, 卷六)

소순(蘇洵,1009~1066년)은 중국 북송의 문인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다. 당송(唐宋) 8대가이고,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3소라 불린다. 청재 선생님께서 원용한 소명윤의 말씀이 나오는 출처는 아래와 같다.

“어버이께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하고 일가친척 사이에 오가는 두텁고 화목한 마음이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孝悌敦睦之心庶可油然而生矣)의 원문과 출처:

觀吾之譜者(관오지보자): 우리의 족보를 보는 사람들은

孝悌之心(효제지심) : 효도하고 우애하려는 마음이

可以油然而生矣(가이유연이생의) : 구름이 피어나듯 생겨나리라.

소순(蘇洵), 족보서(族譜序),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청재 선생님이 정자와 소순의 글에서 취한 바는 수종족후풍속(收宗族厚風俗)과 효제지심(孝悌之心)이다. 두터이 할 풍속의 실체는 효도하고 우애하려는 마음의 실천이다. 당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홀어머니, 유복녀인 다섯 살 아래 동생, 어린 나이에 양부모를 잃은 사촌 동생 등을  잘 보살폈다. 청재 선생님 부부는 상경여빈(相敬如賓) 하셨다. 서로 초대한 손님을 대하듯이 존경하고 양존(兩尊) 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동네에서도 지적 장애와 지체 장애로 고생하는 주민들에게 늘 말씀을 올리셨다. 이른바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달리 말하면, 효제지심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한편 1979년과 2003년에 진주형씨의 대동보(大同譜)를 만들 때도 앞장섰다. 2003년 대동보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2012년 12월 성탄절 직후에 전남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187번지에서 세상 소풍을 마치셨다. 국립임실호국원(전북 임실군) 제1충령당에서 쉬고 계신다.  

▲ 국립임실호국원 제1충령당

정자와 소순의 말씀을 결합하면, 족보는 효제지심의 실천을 촉진하는 매개체이다. 요컨대, 수종족후효제지심(收宗族厚孝悌之心)이다. 족보로써 종친을 잘 아울러야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두터워진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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