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8일 최초의 문예동인지 『창조』를 결성한 김동인은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문예비평가 늘샘(김상천)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의 근대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이광수의 『무정』처럼 과거형 어법과 3인칭 대명사 의 사용, 그리고 구어체 등 근대문학의 형식에 기여한 때문이다. 『창조』 창간호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이 그런 문체 형식을 띠고 있다.

김동인은 「3‧1독립선언」에 앞서 일본 도쿄에서 감행된 「2‧8 독립선언」 행사엔 참석하지 못했다. 바로 그날 친구 하숙집에서 전영택, 주요한 등과 함께 순문예동인지 『창조』 창간을 축하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김동인은 나흘 뒤 도쿄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재차 감행된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체포돼 이튿날 석방됐다. 3‧1운동 직후 3월 5일 귀국한 김동인은 동생 김동평의 부탁으로 만세 시위 격문을 작성했다가 3월 26일 다시 일경에 체포돼 3개월 옥고를 치르고 6월 26일 풀려났다. 당시 열아홉 살 정의감 넘치는 조선 청년이라면 모두 그렇게 행동했던 시절이었다.

평양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일본 유학과 자비로 출간한 문예동인지 『창조』를 발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2‧8 독립선언」이나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이광수, 최린 등 당대 저명한 지도급 인물들이 변절해갔듯이 김동인 역시 민족을 배반한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다. 중일전쟁(1937) 직후부터 김동인은 일제가 패망하던 그날까지 반민족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 오전 10시에, 김동인은 서정주와 함께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阿部達一)를 찾아갔다. 기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인단체보다 더 친일의 강도가 센 문인단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의도였다. 한 마디로 김동인은 뼛속까지 민족을 배반한 인물이었다.

 

▲ 민족문제연구소와 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한 <동인문학상> 비판 세미나 안내 포스터(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글재주라는 근대문학의 형식을 팔아 일본 제국주의에 문필보국(文筆報國)을 다하며민족을 더욱더 고난의 구렁텅이로 내몰아간 인물이다. 그만큼 반민족행위의 정도가 심각한 탓이다. 임종국 선생이 쓴 『친일문학론』(1966)에도 김동인을 비판하고 있고 2009년에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김동인이 친일부역자로 4쪽에 걸쳐 자세히 등재돼 있다. 실제로 김동인은 1938년 2월 4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게재한 ‘국기’(國旗)라는 글에서 ‘일장기를 국민의 정신을 상징하는 최고로 우수한 국기’라고 극찬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엔 이를 ‘성전’(聖戰)이라 미화하며 천황폐하의 충량한 ‘일본신민’(日本臣民)으로 살아갈 것을 부르짖었다.( 『매일신보』 1942. 1. 23. 『감격과 긴장』) 

그가 『매일신보』에 7개월에 걸쳐 연재한 장편소설 『백마강』 역시 문예비평가 늘샘(김상천)의 연구에 따르면 총독부 언론기관이 기획한 시국소설이었다. 백제를 ‘내선일체의 성지’로 묘사한 내용으로 일제에 자발적으로 부역한 작품임은 이미 독립연구자 늘샘에 의해 밝혀졌다. - 김상천(2020). 「야비한 자연주의 - 김동인론」25-28쪽

『약한 자의 슬픔』(1919)이나 『감자』(1925)를 비롯해 김동인을 한국문단사에서는 자연주의 문예사조를 주도한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불륜이든 매춘이든 인간 내면 풍경이나 심리묘사는 매우 정교하다 못해 사실적이다. 그러나 문예비펑가 늘샘의 연구에 따르면 그러한 묘사는 제국주의(강자)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기보다 피해자(약자) 스스로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불의한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다시 말해 김동인의 자연주의 문예사조는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와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해 패배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식민지 강점이 현실화한 상태에서 「3‧1 만세운동」의 패배주의와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로 치달은 일본 군국주의는 김동인의 자연주의 문예사조를 현실도피적인 연애-불륜-간통-매춘 등 지극히 개인적인 ‘연애소설’ 내지 ‘색정소설’에 가까운 작품으로 가둬버렸다. 이는 자신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시마자키 도손의 사소설(私小說)을 조선에 이식한 것이다. 젊은 날 김동인 본인 스스로 호텔에서 숙식하거나 기생들과 자주 어울렸던 전력은 그의 작품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의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하나뿐인 목숨마저 바쳤던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신산한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 김동인의 신화는 걷혀야 한다. ‘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이 아니라 조선을 팔아먹은 ‘1등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으로 그 신화가 걷히듯이 우리들 머릿속에 각인된 신화를 걷어내야 한다. ‘겨레의 큰 시인’ 서정주가 아니라 ‘일제’를 찬양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자’를 연거푸 ‘찬양한 언어 기교의 마술사’로 서정주를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일본 유학 시절 스승 시마자키 도손의 영향으로 자연주의 문예사조를 조선에 이식한 김동인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친일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당대 내로라하는 지도급 문인으로서 김동인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면하긴 어렵다. 항일독립운동을 몸소 실천했던 문인 이육사가 일제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피를 토하고 철창에서 죽어갈 때 김동인은 자발적으로 ‘북지황군위문 문단’을 조직하고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식민지 슬픈 현실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노래한 윤동주가 28살 그 젊은 나이에 피골이 상접한 채로 죽어갈 때 김동인은 서정주처럼 노골적인 친일작품을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정의가 무너진 현실에서 오늘날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긴 너무도 힘들다. ‘1등 신문’을 자처하는 『조선일보』에서 시상하는 ‘동인문학상’은 자라나는 세대를 위해서도 기념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 땅의 문인들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당장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친일단체 ‘대정친목회’가 창간 주체였다는 『조선일보』 스스로 자신의 업보를 씻어내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thics6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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