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범선의 추진기구

1. 노(櫓)

앞장에서 노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이제 노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씩 풀어보자. 배를 움직이려면 움직일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선박의 추진기구라면 노도 있지만 돛도 있고 도(棹)도 선박의 추진기구 중의 하나이다. 먼저 노부터 알아보자.

노는 선박의 추진기구 중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노는 동서의 차이로 각기 다른 두 종류의 노가 있다.

둘 다 배를 추진기구이지만 추진시키는 원리와 방법은 전혀 다르다. 그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노(동양의 노)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의 도이다.

서양의 노는 한 쌍, 두 쌍 또는 여러 쌍을 설치하여 배에 앉아서 잡아당기는 반작용으로 선박이 추진되지만 이러한 형태의 노는 노라고 하지 않고 도(櫂, 棹)라고 한다.

이러한 도를 설치한 배들은 도를 저을 때 몇 개가 되던 하나가 젓는 것처럼 일시에 잡아당기고 일시에 멈추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지만 배가 가다가 멈추고 가다가 멈추기가 반복된다.

우리의 노(櫓)는 한 척의 배에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노를 설치할 수 있으며 배의 길이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기 때문에 다른 배와 붙더라도 노를 계속해서 저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같은 노의 수로 서양의 도만큼 속도를 낼 수는 없는 단점도 있다.

방향을 전환 할 때도 서양식 도는 어느 한 쪽을 눌러서 도가 물에 닿지 않아야 방향을 전환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노는 좌우의 노를 저으면서도 방향전환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점이 다르다.

성종시대의 기록을 보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변처녕(邊處寧)・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종생(李從生)・우도 병마절도사 이흠석(李欽石)・수군절도사 유제(柳睇)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적선(賊船)의 출입을 알 수 없고, 또 병선(兵船)은 노(櫓)가 없고 도(棹)만 쓰기 때문에 완급(緩急)에 마음대로 운용하지 못하니, 심히 불편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선(戰船)의 체제가 무겁고, 크며 높아서 얕은 물이나 큰 바람을 만나면 사람의 힘으로는 진퇴(進退) 시키고 돌릴 수가 없으니 별도로 비선(飛船)을 건조하는데 본판 3장(배의 밑이 좁아졌음을 알 수 있다)을 길이가 7발되게 하고 협판(挾板)에는 5개의 도리를 얹은 다음 배위에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걸쳐서 판옥(板屋)을 만들고 판옥 안에는 10개의 노를 설치하여 열 사람이 앉아서 노를 젓도록 한다고 했다.

앉아서 노를 젓는 것은 도에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기록에서 우리의 전선도 도(櫂, 棹)를 사용한 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 이는 필시 거북선과 같은 전선을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의 노선(櫓船)은 노의 되놀림에 의하여 배를 추진시킨다. 그러나 도선(櫂船)은 도의 반작용으로 배를 추진시킨다. 즉 도와 노는 배를 추진시키는 원리와 노를 젓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노를 저으면 노의 끝은 마치 8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것같이 된다(∞, 이러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노를 하찮게 여기지만 이러한 노가 현대의 선박에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추진 기구다.

이 노가 배를 추진시키는 원리를 보면, 노에는 반드시 노 반드래라고 하는 줄이 있는데 이 줄 때문에 노가 더 높이 올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노를 밀고 당길 때 고정된 줄 때문에 물속의 노잎이 물을 밖으로 처 올리는데 그 힘 때문에 배가 앞으로 나간다.

중국의 문헌에는 북송 때 저작된 태평어람(982) 권771 주부(舟部)편에는 선박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다.

즙조(檝條)에 공자(BC551~479)이전에 저작된 시경에는 회즙송주(會檝松舟)라 했다. 즉 노송으로 즙(노)을 만들고 소나무로 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경과 회남자(淮南子) 등 상고 문헌들도 하나같이 노를 즙(檝)이라 하였으며 접으로도 발음한다.

그러다가 최초의 한자자전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 AD 100)에 이르러 즙을 도(棹)라 하였으며 이것이 지금의 도이다.

이처럼 중국배의 추지기구는 아득한 옛날부터 즙, 접, 도라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작은 것은 접이라 하고, 큰 것은 도라고 구분하기도 하였지만 그 기능은 다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노가 없었다. 1세기경에 처음으로 노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 후 100년경에 저작된 석명(釋名)에 이르러 처음으로 배의 옆을 노라고 하였으며, 노(勞) 또는 려(旅)라고도 하였다.

려를 이용해야 비로써 배가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또한 청나라 강희년간(1622~1722)에 저작된 정자열의 <정자통(正字通)>에 이르러서 선박의 노는 도에서 차용하였으며 세간에서 노(櫓)로 개작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노가 도에서 차용된 것이 아니라 뱃사람들이 노라고 부르던 것을 노(櫓)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노라는 명칭이 원래의 중국어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쓰던 외래어였을 것이다. 무비지 등 중국의 사서를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도선(櫂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가 등장한 1세기는 백제인들이 주산군도로 진출하여 회계동제인(會稽東薺人)으로 불리었던 때였다고 한다.

노와 백제인의 등장시기가 1세기라는 시점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즉, 백제인이 중국의 전통적인 도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타고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월절서>에 의하면 대익(大翼)이라는 군선이 길이가 120척(당시의 1척: 약23cm), 폭이 1장6척, 총 승무원 수 91인, 이중 26인은 전사이고 도졸(櫂卒, 노군)이 50인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중국의 배에는 노가 아닌 도가 설치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럼 이러한 노들이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노를 알아보자.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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