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목) 나는 친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고양 서삼릉을 찾았다.

서삼릉은 사적 제200호, 한때 이곳에 있었던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을 중심으로 희릉(禧陵) 효릉(孝陵)이 있는데, 그 근처에 왕실 묘지가 이루어져 명종(明宗) 숙종(肅宗) 이후 한말까지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가 만들어졌다. 고종(高宗) 원년에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효릉 희릉 예릉의 3릉을 일컬어서 '3릉'이라 불렀다.  또한 그곳엔 일제가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모두 옮겨 조성한  태실군도 있다.

헌데, 이 태실군과 왕실분묘군은 그동안 비공개 구역으로 공개되지 않았다가 지난 16일 처음으로 공개하였다.

3일전 인터넷 사전예약을 했다. 예약시간 오후2시,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먼저 태실군으로갔다.

이곳은 오석(烏石)비군과 화강석(花崗石)비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태실도 있었다.

다시 왕자, 왕녀 묘역으로 갔다.  이 묘역은 조선과 대한 제국의 왕과 황제의 왕자묘 8기와 왕녀묘 18기 등 22기의 묘를 일제강점기에 옮겨온 곳이다. 각 묘에는 옮겨진 후 새로 세운 묘비석과 원래 묘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비석 뒷면에는 언제 옮겨졌는지에 대한 내용이 있다.

특히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묘역은 모두 하나의 담장 안에 있으며, 묘역 앞에는 문인석과 상석,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해설사는 다시 우리를 후궁묘역으로 안내했다. 이 묘역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정조의 의빈(宜嬪) 창녕성씨(昌寧成氏)의 묘다.

원래 이 묘는 효창공원 내에 있었으나 1944년 일제가 강제로 지금의 이 자리로 옮겼는데, 그 과정에서 본래의 규모나 모양이 크게 훼손되었다. 다만 정조의 어제비(御製碑)가 남아있어 정조의 후궁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후궁임을  알 수 있었다.

비문(碑文)은 어려운 한문(漢文)으로 쓰여 해독하기 어려웠다.

의빈 성씨(1753-1786)는 원래 궁인의 신분으로 입궁한 뒤 후궁이 되었으며 세자로 책봉된 아들(文孝世子)가 죽은 뒤 몇 개월 지나 임신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문을 통해 정조가 의빈 성씨를 얼마나 사랑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어머니다. 문효세자가 1786년 음력 5월에 세상을 떠나고  여섯 달 뒤 병오년(1786년 음력 9월14일)에 빈도 세상을 떠났다.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정조 임금이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빈은 눈물을 흘리며  "세손빈(孝懿嬪)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하며 사양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한다.

이에 정조는 빈의 마음을 깨닫고 다시는 재촉하지 않았단다. 그 후 왕실에서는 15년 동안 널리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간택했다. 그 뒤 정조는 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빈이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빈은 비로소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한다.

정조는 궁녀를 가까이 하지 않는 왕이었다. 여색도 즐기지 않았다. 문무에 능한 완벽주의 왕, 그만큼 예민하고 까칠했던 그런 그가 유독 의빈 성씨만은 좋아했다.

<이재난고>에 의하면 의빈 성씨의 이름은 '성덕임'으로 혜경궁 홍씨 아버지 집의 청지기 딸이다.

10살 때 혜경공 홍씨 처소의 궁녀로 들어갔다. 그때 혜경궁 홍씨에게는 의빈 성씨와 비슷한 또래의 자식이 3명 있었다. 바로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가 그들이다.

정조 이산이 의빈 성씨 덕임을 처음 만난 것이 이때였다. 그때 이산의 덕임에 대한 연민이 싹터 결국 빈으로 맞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빈 성씨가 죽자 정조는  <어제비문>과 <어제의 빈묘지명>을 내렸다.

일찍이 왕이 후궁에게 내린 비문의 예는 없었다. 그렇게 정조는 의빈 성씨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는 묘비에 이렇게 적었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당당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여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위키백과 의빈성씨 '어제비문' 참고)

사랑하는 아내(빈)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애통해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다.

현재로 봐선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만 정조는 의빈 성씨가 죽은 뒤 그 무덤을 아들인 문효세자의 옆에 마련했다. 아무리 아들과 생모사이지만 후궁은 자신이 낳은 자식보다 서열이 낮았다. 어머니(후궁)로 자식(세자)에게 반말할 수도 없고, 어머니란 소리도 감히 듣지 못하는 불쌍한 자리였다.

하지만 정조는 그 모든 것을 깨고 의빈 성씨를 문효세자와 같은 곳에 묻고 그 무덤을 자주 찾았다.

일찍이 후궁의 무덤에 왕이 이렇게 자주 찾은 일이 있었을까?

왕이 자주 거동한다하여 '거동고개'라는 지명도 생겼다 한다. 원래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 묘는 고양군 율목동에 있었다가 그 뒤  효창원(孝昌園)으로 옮겼다. 지금의 효창공원이다.

하지만 이런 정조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제는 강제로 무덤을 이장시켜 의빈성씨와 문효세자의 무덤을 서로 다른 곳에 있게 했다. 현재 문효세자의 무덤은  이곳 서삼릉에 서로 떨어져 있다.

조선 22대왕 '정조'와 그의 유일한 승은을 받은 후궁 '의빈성씨'의 사랑이야기가 알려진 것은 아마 드라마 '이산'일 것이다.

의빈 성씨의 어제비문, 이는 바로 정조의 의빈 성씨에 대한 '사부곡'(思婦曲)이다.

나는 정조의 이 사부곡을 되새기며 릉을 나왔다. 차에 올라서도 자꾸만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의 드라마틱한 사랑 여정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랑! 사랑! 사랑!

진정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때 저쪽 나무 가지 위서 까치가 "까악 까악" 울었다.

2020. 10. 25.
김포 여안당에서 한송 포옹 쓰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정우열 주주통신원  jwy-hansong@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