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 양회갑 선생님은 1957년 정월 대보름날을 맞이하여 진주형씨 병사공파보의 서문을 지었다. 서문은 족보와 파보(派譜)의 의의, 진주형씨의 유래, 병사공파의 내력, 자신이 서문을 짓게 된 동기와 배경 등으로 이뤄졌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에서 보면, 양회갑(梁會甲; 1884∼1961년, 향년 78세) 선생은 일제강점기 유학자이다. 호는 정재(定齋)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전남 화순군 이양면 초방리(草坊里) 출신이다.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서 <학포집> 간행을 주관하였다. 유고로 <정재집(定齋集)> 16권 7책 등을 남겼다.

정재 선생님이 지은 글의 원문과 음, 번역문은 아래와 같다. 

▲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 자료: <진주형씨파보(병사공파)>, 1957.01.

<번역문>

위로는 조상의 세대를 기술하고 아래로는 자손이 씨족의 시작과 내력을 깨우치도록 하니, 족보를 만드는 도리는 그 의미가 크다. 위로는 조상의 위치가 바뀌고 아래로는 종친의 계통이 바뀔 정도로 씨족이 점점 많아지고 족보가 점점 넓어지니, 분파(分派)하여 족보를 만드는 까닭은 형세가 그래서이다. 나는 진주 형씨의 파보를 만듦에 파보(派譜)로 나누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안다.

삼가 살펴보면, 형씨는 당(唐)나라 학사인 대광보국공 형옹(邢顒)이 족보에 오른 조상이다. 여러 대를 지나 시중공(侍中公; 형방; 邢昉)에 이르러 역시 대광(大匡)을 하고 처음 진주에 거주하였다. 상서공(尙書公; 형승서;邢承緖)은 청렴결백하다고 등록되었다. 시중(侍中) 좌복야공(左僕射公; 형공미; 邢公美)은 왜를 정벌하여(1281년 당시 고려를 끌어들인 원나라의 제2차 일본원정) 일등 공신이 된 연유로 진양군(晉陽君)으로 봉해졌다. 이때부터 진양은 형씨의 본관이 되었다.

상서(尙書), 전서(典書), 판서(判書)는 족보에 끊이지 않고 기록되었다. 우리 조선왕조에 이르러 호판공(戶判公; 형찬; 邢贊)의 자손이 전북 남원에 거주하였다. 그의 넷째 아들인 충청병사공(忠淸兵使公; 형군철; 邢君哲)이 전남 나주 남평으로 이사하였다. 남평 현감(縣監; 병사공의 증손 형자관; 邢子寬)은 부친 형용인(邢用仁)에 이어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였다.

도곡공(형세영; 邢世英; 병사공의 현손)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 음력 08.10~1519. 음력 12.20.)의 문하생으로서 능성(綾城; 지금의 전남 화순군의 능주, 이양, 한천, 청풍, 도곡, 도암 등의 일원)에 자리 잡았고, 우리 선조 학포(學圃; 양팽손; 梁彭孫; 1488~1545년)선생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인해 향리로 돌아오니 수십 세의 씨족이 점점 많아지고 족보가 점점 넓어졌다.

대개 영남과 호남의 여러 종친이 두터운 정으로 화목하다면, 마땅히 가깝게 지내야 할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도리를 다한 셈이다. 그러나 세대가 멀어져 신분이 갈리고, 사는 곳이 멀어져 지역이 나뉘고, 결국 신분과 지역이 갈리면 사람도 부득불 나뉘게 된다. 효도하고 우애할 뿐만 아니라 정이 두텁고 화목한 기운은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나중의 어떤 날에 족보를 합함이 형편에 적합하다면 우선 파보를 만들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족보를 모두 세 번 만들었다. 1808년 무진보와 1923년 계해보는 (판서공파와 병사공파가) 합쳐서 만든 대동보인 반면에 올해 1957년 정유보는 병사공파 자손끼리 만든 족보이다.

족보를 만드는 사업이 거의 끝날 무렵에 후손인 형시억(邢時億), 형시백(邢時伯), 형광열(邢光烈) 세 분이 나를 찾아와 족보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글재주가 없어 감당하기 어려웠다. 선조로부터 쭉 동향인(同鄕人)으로 대대로 사귄 우의가 근원이 깊어서 수백 년이나 끊임이 없었다. 사양할 수 없어서 대대로 내려오는 계통, 관직과 작위, 족보를 만든 작업의 처음과 끝을 서술하여 보답하는 바이다.

정유(1957년) 정월 대보름날을 맞이하여

제주(濟州) 양회갑(梁會甲)이 서문을 쓰다

 

번역문의 두 번째 문단 말미를 보면, “이때부터 진양은 형씨의 본관이 되었다.” 진양(晉陽)은 조선조에 들어와 진주로 개칭되었다. 이런 연유로 형씨의 본관은 진주(晉州)로 불린다.

세 번째 문단에 벼슬 이름인 상서, 전서, 판서 등이 나온다. 거의 동일한 지위를 지닌 벼슬은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렸다.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은 고려 시대에는 상서(尙書)로, 고려 말 이후 조선 초에는 전서(典書)로, 조선조 태종 이후에는 판서(判書)로 각각 불렸다.

네 번째 문단에서 도곡공(道谷公)은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도곡공 행적>에 따르면, 도곡공은 경릉(敬陵) 참봉에 발탁되었으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 임금은 호조 참판의 추증을 내렸다.

다섯 번째 문단에서 보면, 진주형씨 문중은 “족보를 모두 세 번 만들었다.” 1808년, 1923년, 1957년에 족보를 만들었다. 실제는 더 여러 번 만들었다. 1957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곱 번 족보를 만들었다. 즉, 1706년 숙종 32년 병술보, 1763년 영조 39년 계미보, 1808년 순조 8년 무진보, 1853년 철종 4년 계축보, 1899년 고종 36년 기해보, 1923년 일제강점기 계해보, 1957년 정유보(병사공파보) 등이다. 정재 선생님이 어떤 연유로 실제와 다르게 세 번 족보를 만들었다고 서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1957년은 6.25사변이 정전된 지 3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라 온전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상황이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진주형씨 병사공파보의 서문에 투영된 정재 선생님의 심오한 학문과 고매한 인품에 경의를 표한다. 충심(衷心)으로 마땅한 일이다. 정재 양회갑 선생님이 출생한 화순군 이양면 초방리(草坊里)는 양촌마을, 동촌마을, 상초방마을, 큰덕골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될 정도로 큰 마을이다. 나의 어머니는 1790년경 초방리에 터를 잡은 하동 정씨의 후손이다. 나의 선친인 청재 형선기 선생님은 아마도 병사공파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정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두 분의 호는 각각 정재(定齋)와 청재(淸齋)로 그 발음도 뜻도 가까워 보인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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