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온 주주통신원은 한겨레신문 주주여야 자격이 생긴다. 나는 어떻게 주주가 되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30년 넘게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82년, 난 야학이란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 남동생이 먼저 활동하고 있었는데 교사가 부족하니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당시 '야학'이라는 용어는 내게 생소했다. '그런 곳도 있어?', 할 정도로 의아했다.

내 앞의 삶만 생각하며 평범하게 살아왔기에 그랬으리라. 야학이 어떤 곳인가를 듣자 그 낯선 세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야학(夜學)은 글자 그대로 해 진 시간, 밤에 공부하는 배움터였다. 낮에는 공부할 수 없어 일을 마치고 와서 배우려는 사람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스물 안팍의 여성들이었다.

주로 봉제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부족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들은 고된 노동을 하고 와서 피곤한 몸으로 학업을 했다. 야근을 하면 올 수 없어 수업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교사진은 대학생들이었는데 열정이 넘쳤다. 야학에 맞는 교육 과정을 짜고 그것을 등사기로 인쇄해 교재를 만들어 수업했다.

민중가요나 사물놀이도 함께했고,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는 '상록수'를 교가일 정도로 많이 불렀다.

학생들의 작업장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도 들어주고,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고, 농담도 주고받았다.

내가 참여한 그곳은 을지로 5가와 청계천 5가 사이에 있던 '까르딘 야학'이었다. 네덜란드 신부 까르딘이 설립하였기에 '까르딘 야학'이 되었다고 여겼다.

1970년 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위해 싸웠던 전태일 사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야학 분위기에서 알 수 있었다. 1974년에 설립되었는데 1982년까지도 여전히 그 사건의 흐름 속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야학 경험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한 이유가 있다. 20대의 청춘을 그곳에서 보낸 후 사회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과 의식이 변했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봉제업 노동자와 운동권 성향의 대학생이 만난 야학은 1970~80년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만약 야학을 모르고 살았다면 노동자의 현실이나 민주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까?

80년대 말, 까르딘 야학은 역사의 뒷골목으로 사라졌지만 민주주의 꽃을 피우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몇 분과는 아직도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유신독재정권이 끝나는가 했는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유발한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를 참혹하게 짓밟았다. 이런 와중에서 국민들의 민주주의 열망은 극에 달했고, 한겨레신문사는 국민주 모집에 나섰다.

야학이 사라질 즈음 한겨레신문의 태동 소식을 들었고, 자연스레 내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야학 활동 경험과 의식 변화가 없었다면 한겨레신문 국민주 모집에 내가 선뜻 참여할 수 있었을까.

고백하건대 안 했을 것 같다.

다행히 한겨레신문 창간주주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그 연이 이어져 '한겨레:온 주주통신원'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얼마 전 이요상 통신원님이 올린 기사 <'반헌법행위자 열전(가칭)' 만든다>의 기미 독립선언문 33인을 본 딴 초기 제안자 33인 명단 및 프로필 중 반가운 인물이 눈에 띄었다. 까르딘 야학에서 함께했던 김상봉 선생님!

김 선생님의 책 <세 학교 이야기> 중 하나가 '까르딘 야학' 이야기다.

 

편집 : 김유경 편집위원

양성숙 주주통신원  ssooky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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