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로를 건너 정동으로 들어간다. 정동은 대한제국 시기 개화운동의 상징인 구역이었다. 따라서 정동은 ‘공사관구역(Legation Quarter)’, ‘공사관거리(Legation Street)’, 또는 ‘유럽인정착지(European Settlement)’ 등으로 불리었다. 1883년 부임한 미국공사 푸트(Lucius Harwood Foote, 한국명 복福德, 1826-1913)가 민 씨 일가의 집을 두 채 사들여 공사관을 연 것을 시작으로 영국공사관이 들어왔다. 이후 조선과 조약을 맺은 강대국들은 정동 안이나 정동 근처에 자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을 지었다. 1884년 이후부터는 서양 민간인들도 정동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국의 공사관이나 영사관 주변에 거주지를 잡고 선교 및 교육 활동을 펼쳤다. 정동은 곧 외교의 중심가이자 선교 활동의 근거지, 또는 신학문의 발상지로서 근대문물의 전파지가 됐다.

배재학당(培材學堂)
능선을 따라 성곽이 축조됐을 것이므로 성곽은 정안빌딩 왼쪽으로 지나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배재학당길’이 있다. 길 왼쪽으로는 순화빌딩과 평안교회가 보이고, 이 두 건물 사이 담장 옆으로 ‘수렛골’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은 차동(車洞)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옛날 숙박시설이 많은 이곳에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소의문과 돈의문이 근방에 있어 이 문들로 도성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숙박업소였을 것이다.

구부러진 ‘배재학당길’은 정동과 순화동의 법정동 경계인데, 이 길을 따라 성곽이 지나갔을 것이다. 배재학당길의 종착점은 배재공원이다.

배재학당, 그것은 우리나라 신식교육의 효시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우리나라에도 서양문물이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는 그해 8월 3일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학당이라는 학교 이름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줬다. 이날이 배재중·고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 됐다.

한옥 한 채를 구입해 두 칸 벽을 헐고 교실 하나를 만든 게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전국 남학생들이 이 근대식 학교로 몰려들자 아펜젤러는 1887년 8월 한옥교사 대신 양옥교사를 착공하고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그것은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1층 면적이 100평을 넘었다. 이 구교사는 1932년 대강당 신축을 위해 헐렸다.

두 번째로 지은 건물이 현재 배재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동관이다. 지상 2층 반지하 1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 1914년 5월에 착공해 1916년 3월에 준공했다. 배재학당 구내에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서 깊은 이 건물은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돼 있다. 동관 건물 앞에는 수령 525년이 된 보호수 향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매어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때 끈을 매었던 대못이 지금도 나무 허리에 박혀있다.

세 번째로 지은 서관은 1922년 4월에 착공해 1923년 3월에 준공했다. 건축양식은 동관과 같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던 쌍둥이 건물이다. 이 건물은 배재고등학교가 고덕동으로 이전할 때 함께 이전했다.

네 번째로 지은 건물은 배재학당 구교사를 헐고 지은 대강당이다. 1932년 9월에 착공해 1935년 5월에 준공했다. 1,322㎡에 철근콘크리트 벽돌 건물이었다.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는데, 현재 배재빌딩을 지을 때 헐려버려 중요한 사적 하나가 사라졌다.

배재학당을 회고하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떠오른다. 그는 아펜젤러가 가장 아끼는 학생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한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 망명하고, 광복 후 귀국해 한국 정치의 중심인물이 됐던 것에도 배재학당의 학생으로서 맺은 인연이 단초가 되지 않았을까?

배재학교는 1984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사했고 지금 그 자리는 ‘배재공원’이라는 시민 쉼터가 됐다. ‘배재학당길’은 ‘배재공원’에서 끝나는 것 같은데, 유심히 살펴보면 러시아대사관의 뒷문까지 연결된다. 러시아대사관 터가 과거 배재학당의 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재공원’의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터는 1885년 8월 3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설립, 이 땅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요, 신문화의 요람지다. 1895년에는 여기에서 독립협회가 태동했고, 독립신문도 발간되었다. 또한 1897년 맨손체조를 비롯하여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동과 순화동의 법정동 경계는 이 길의 진행방향과 일치하며 또한 성곽의 진행경로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대사관 구역은 러시아의 치외법권 구역이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 행선지인 이화여고 노천극장까지 이리저리 돌아가야 한다. 가장 빠른 길은 배재공원을 지나 정동제일교회를 끼고 정동길로 들어선 후 이화여고 동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배재공원 안에 있는 배재학당 약사 표지판.
▲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향나무보호수.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매어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옴.
▲ 배재학당 동관. 현재 배재학당 구내에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건물로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