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놓쳤나 걱정했어요. 우리 딸네 주려고 만두를 빚다 보니 선생님 생각이 나서 조금 가져왔어요. 맛이 없더라도 드셔보세요.” 영어 강의를 끝내고 복지관을 나서는 내게 한겨울 찬 공기 속으로 하얀 입김을 뿜으시며 황 할머니가 봉지를 건네셨다.

여든네살로 수강생 중 최고령인 그분을 2년 전 만났을 때 ‘저 연세에 영어를 왜 배우실까’ 의문이 들었다. 황 할머니는 수업 30분 전에는 강의실에 나오셨다. 눈이 마주치면 늘 수줍게 웃으셨다. 알고 보니 미국에 사는 막내딸을 만나러 가실 때면 까막눈이라 답답했다는 것이다. 손주들도 영어가 더 편해 의사소통이 어려운 적도 있단다. 영어를 익혀야 할 동기가 뚜렷한 그분은 숙제도 빠짐없이 해 오셨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실력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려버린 나는 어르신들을 만나는 시간이 푸근하게 느껴지고 좋았다. 특히 황 할머니는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또래이신데다 모습까지 비슷해 더 정이 갔다. 내가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지만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늘 시간을 잘 지키시는 성실성, 숙제도 빠짐없이 하시는 열정, 결석하실 때는 미리 문자로 알려주시는 배려, 작은 것이나마 알게 되셨을 때 한껏 기뻐하시는 순수한 마음, 긴 세월 살면서 터득하신 삶의 지혜와 감사하는 마음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물론 앞사람이 가려 칠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든가 어느 분이 질문하다 옆길로 샐 때 공부에 방해된다는 불평을 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조금 기다리면 나름대로 이해하시며 교실 분위기를 잘 꾸려 가신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방학이 지나고 개학을 했는데도 황 할머니는 나오시지 않았다. 하루이틀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다. 알음알음 알아보니 더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인천 어느 요양병원에 계신다고 했다. 나는 문병이라도 가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가슴이 허전하다. 그 추운 겨울날 하얀 입김을 뿜으시며 나를 반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날 만두를 채운 내용물은 그분의 사랑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가슴속 뻥 뚫린 구멍을 그 따뜻한 사랑으로 채웠다.

박미령 주주통신원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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