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공사관과 아관파천
이야기는 다시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국교를 맺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러통상조약이 체결된 시기는 1884년이었다. 1년 후인 1885년에 러시아공사관이 준공됐다. 당시 러시아공사관의 위치는 경희궁 동쪽 맞은편 언덕이었다. 그곳은 도성 안에서 ‘봄을 머금고 있는 동산’이라는 의미의 함춘원(含春苑) 세 곳 중 한 곳이었다. 다른 두 곳은 창덕궁 동쪽과 서쪽 언덕이었다. 이 중에서 경희궁 동쪽 언덕에 있는 함춘원을 상림원(上林苑)이라고 불렀다. 상림원은 임금이 조석으로 바라보는 절대보전 숲이었다. 힘없는 조선 정부를 압박해 이 전망 좋고 아름다운 숲 지대를 얻어내 공사관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엔 고종과 민비가 일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친노정책을 펴고 있기까지 했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는 일본군, 자객, 조선의 친일파 등을 동원해 민비를 시해했다. 민비 암살 이후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제의 포로가 됐다. 1896년이 되자 고종의 불안과 공포심은 더 심해졌다. 이해 2월 2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에게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것을 통보했다. 즉 친일반역자들이 자신과 세자를 살해하려 한다고 해 아관파천(俄館播遷) 후의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고 베베르 공사와 그 후임 알렉시스 스페이에르 공사는 처음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난감해 했으나 마침내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고 아관파천을 실행했다. 그 후 고종은 일 년간 그곳에 체류했다.

해방 후 러시아공사관은 1945년에 잠시 소련 총영사관 구실을 했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때 탑만 남고 모두 파괴됐다. 이후 한국 정부는 러시아공사관 부지를 국유화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973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했으며,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 보수했다. 그곳은 현재 정동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러시아대사관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한 후, 한러 외교관계가 재개되자 국유화된 옛 러시아공사관의 재산소유권 문제가 대두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한소 수교를 맺을 때 소련은 옛 러시아공사관 부지를 돈 주고 샀다면서 고종황제로부터 받은 계약서를 내밀고 옛 공사관 터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이 조약도 자연히 폐기됐다. 그럼에도 소련은 7,500평의 옛 러시아공사관 땅을 그대로 돌려주든지 1990년 당시 공시지가인 평당 400만 원으로 산정한 부지 전체 땅값 3,000억 원을 갚든지 선택하라고 종용했다. 옛 공사관 땅 가운데 3,000평은 서울시가 이미 팔아버렸고, 나머지 4,500평은 사적 253호로 지정돼 원래의 땅을 돌려줄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소련에 새 대사관 부지를 마련해줘야 했는데, 소련은 정동을 벗어날 수 없다고 고집했다.

1997년 7월 한러 정부 간 협정 두 가지가 조인됐다. 한국 정부는 구 러시아 소유 재산의 국유화에 대한 배상으로 옛 러시아공사관 근처 부지에 지을 대사관 신축비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그 대체 부지는 바로 옛 배재학당 운동장 부지로 마련했다. 그 부지는 러시아에 향후 99년간 무상 임대하기로 하고, 김원의 설계로 러시아대사관을 지었다.

러시아대사관을 신축할 때 대사관 부지, 그러니까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도성 성곽의 유구가 발견됐다. 그것은 서소문에서 돈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일부로 약 50m 정도 됐다. 그 유구를 복원하자는 한국 측의 제안은 러시아대사관 측이 성곽을 복원하면 높이도 낮고 보안에도 문제가 있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한러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된 공관 부지 교환 협정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옛 러시아공사관의 유구. 1885년 준공된 건물로 본체는 사라지고 탑만 남았다.

정동제일교회
미술관 길에서 덕수궁 방향으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이고, 이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사적 제256호 정동제일교회를 만나게 된다. 이 교회는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다. (참고로 말하면 국내 최초의 개신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지금의 예원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세운 정동교회다) 신축 당시에는 예배당 건물의 평면구조가 십자가형이었지만, 1926년 날개 부분의 벽에 맞춰 증축하는 바람에 현재와 같이 직사각형이 됐다. 이 건물이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더불어 개화기 미국문물 도입의 통로 역할을 했다.

서재필은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뒤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는 강의를 하면서 정동교회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를 조직해 독립협회의 전위대를 만들었다. 이 협성회는 정동교회청년회의 노병선, 이승만, 신흥우 등이 주도했다. 그들은 토론회와 음악회, 연극 등을 열어 민주주의 훈련, 신문화 수용, 민족의식 고취,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운동 등에 이르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1918년에는 국내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성가대가 운영됐다. 이 교회 음악 활동을 통해 김인식(金仁湜), 이흥렬(李興烈) 등의 음악가들이 나오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에는 전 교인이 참가해 일제로부터 처참한 핍박을 받았다. 그 당시 담임목사였던 이필주(李弼柱)와 장로였던 박동완(朴東完)은 33인 민족대표로 참가했다. 이로써 정동제일교회는 두 사람의 민족대표를 배출한 교회가 됐다. 또한 이 교회는 일제강점기 탄압 아래서도 여러 가지 문화 활동과 무산대중을 위한 야간학교 개설 등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에는 남북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해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를 창설하는 데 이 교회 직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정동제일교회 정문.

정동의 근대화와 성곽의 파괴
정동은 예로부터 여성과 인연이 깊었다. 정동(貞洞)이란 이름부터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후비였던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이 있던 자리에서 유래했다. 정릉은 왕자의 난 이후 태종 이방원에 의해 지금의 정릉으로 이전됐지만 동네 이름은 그대로 불리고 있다.

근대 개화기의 정동엔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공사관이 들어섰고, 기독교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이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이렇게 공관을 비롯한 교육, 종교 관련 근대 문화 시설이 건설되면서 정동 일대의 성곽은 철저히 허물어졌다. 우리는 다만 근대기 시설물의 저변에서 성곽의 흔적만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중 한 곳이 이화여고와 러시아대사관 담장 아래에 묻힌 성곽 유구다. 또 한 곳은 이화여고 원형극장을 빙 둘러서 이화여고와 창덕여중 담장이 맞붙어있는 철책 아래에 위치한 2~3단 정도의 유구다. 원형극장이 있는 곳은 순화동이고, 대사관 쪽으로 담장을 넘어가면 정동이다. 즉 노천극장은 도성 밖이고, 러시아대사관은 도성 안이다. 그러므로 이화여고와 러시아대사관의 담장을 따라 성곽은 이어졌을 것이다. 다음으로 정동과 순화동의 법정동 경계는 대사관 담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노천극장의 곡선을 따라가다가 창덕여중의 담장으로 이어진다. 담장 아래로 보이는 성석은 담장을 따라 도성성곽이 지나갔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담장을 따라 심어놓은 등나무길이 도성성곽 탐방로가 되는 셈이다.

▲ 이화여고 노천극장 위에서 바라본 러시아대사관. 도성 밖 노천극장과 도성 안 러시아대사관 사이 담장을 경계로 성곽이 이어졌을 것이다.
▲ 이화여고 노천극장과 러시아대사관의 경계가 되는 담장.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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