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역을 지날 때 옆에서 누가 물었다. “태평역을 가려면 이 전철이 주욱 가남유?” “아니요. 복정역에서 갈아타야 해요.” “그렇지. 참 나 그거 알고 있었는데 깜빡했네유.” “조금 있다가 또 물어보세요.” 둘이 마주보며 웃었다. 일하고 온다는 71살의 할머니. 무슨 일을 하시나. 남매를 두었다는 할머니는 남의 집 파출부로 다니고 있었다. 신흥동에 4억원 정도 나가는 집에서 혼자 산다고 했다. 내가 아는 아주머니는 반찬을 잘해서 서울 부잣집에 파출부로 28년 다녀 궁내동 10차선 대로변에 3층짜리 빌딩을 지었는데, 파출부 아주머니들 알부자시네요.

딸은 경상도 가서 잘 살고, 근처에 사는 아들이 “돈이 모일 만하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돈 달라고 주판알을 튕긴다”며 할머니 식으로 표현했다. 손자들 학원비 어쩌고 하면서 ‘아이고 어머니’ 이러면 주고, 또 주고, 아주 버릇이 들었단다. 그래 남편은 어떤 사람? 말도 말아요, 여기꺼정. 그래요.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대요. 맞아요, 그건 맞아요. 그걸로 봐서 그녀가 시원찮은 남편을 둔 것은 사실이다.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한테 돈 찔러주기가 습관처럼 되어 있다. 남의 할머니 어쩌구 할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러는데 뭐. 나는 쓸 것 안 쓰고 모아서 그저 자식 오면 돈 찔러주는 데 이골이 났다. 이러면 안 된다고 텔레비전에도 나왔다. 조잡한 유전자 같으니라고. 자식에게 너무 잘해줄 필요가 없다. 열번 잘해주다가 한번 좀 서운한 듯하면 전체를 한번도 안 해줬다는 식이다.

맞아요, 맞아요. 그런데 어디 사셔. 이 대목에서 어디 사는 것은 중구난방 왜 나온대유. 마음을 읽어주니 화색이 밝아진다. 태평역. 그 할머니가 하는 말. “난 숙맥이여. 너무 착해.” 큰 소리로 웃으면서 내린다. 70대 노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어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셔. 어여 가셔, 잘 지내셔” 하며 손을 흔들었다. 자식에게 돈 찔러주기. 이건 나한테도 이르는 경계의 말이다. 손자 보면 해줄 게 없으니 ‘어부바’ 하면서 등만 들이미는 할머니랑 뭐가 달라. 이건 순전히 내 얘기잖아.

장영희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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