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생 나의 엄마는 정신대 관련 피해자다. 몇 년 전 어느 날 엄마와 티브이뉴스를 보던 중 소녀상으로 인해 소란한 장면이 나왔다. 귀가 어두운 엄마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나는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를 간략히 설명했다.

엄마가 갑자기 치마를 걷어 자신의 두 발을 가지런히 맞추었다. 두 발 길이의 차이가 심했다. 오래 전 관절염을 앓았기에 그것 때문인가 나는 무심상하게 보았다. "너거 외할배가 우리 형부(의사) 시키가 내 발목을 끊았다. 붕대를 얼매나 마이 감았던지 내 다리가 짚단만 했다. 이장캉 높은 놈들이 자꾸 찾아와사가 붕대를 밤낮 감고 있아노이 고름이 차고..." "그 이야기를 왜 이제 하는데?" "야야, 이 이야기는 절대 니캉 내캉만 알아야댄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안 한 나는 죄인이다. 죄가 어디 가나? 지금이라도 남들이 알아바라. 무신 일이 있일지...알았제? 너거 외할배가 내보고 죽는 날까지 비밀로 해야댄다캤는데...절대로 니만 알고 남들한테 카지마래이."

나는 비밀보장을 다짐받으며 아득한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친구들이 열 하나랐는데 둘이 돌아오고 나머지는 모린다. 어데서 죽았는지 살았는지. 우리 황남 살 때 건네집 할매 알제? 그 할매 큰 딸캉 작은 딸캉 둘이가 만주 어데로 붙들리 갔는데 몬 왔다. 아매 죽었지. 살았이믄 안 올 리가 있나. 저거 엄마가 얼매나 기다맀는데, 하도 울아가 눈이 다 짓뭉캐지고..."

그 할머니가 장독대에 물 대접을 올리고 달에게 무어라 빌며 하염없이 손을 부비던 모습을 자주 보았다. 1943년 경주시와 월성군에서 대규모의 정신대 모집이 이뤄졌다. 몇 명이 아니어서 월성국민학교 운동장에 줄을 세워 실어갈 정도였다.

나는 일제의 만행을 엄마에게 낱낱이 일러주었다. "나도 울아부지가 아이랐이먼 그래댔을 꺼 아이가. 아이고오~~~ 아부지요~~~내 친구들은 다 우째 댔이까. 내만 살자꼬...아이고오 이 일을 우짜꼬오~~~" 그 날 엄마는 대성통곡을 하며 친구들 이름을 불렀다. 엄마는 어릴 적 친구들에게도 부채의식이 강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전과자처럼 여겼다.

해방 이듬해 외할아버지는 딸의 장애를 참고해 가난한 나의 아버지에게 시집을 보냈다. 젊은 날 엄마는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학부모로 학교에 오는 날은 뛰어난 맵시에 무척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근데 그 모든 게 다 자신의 장애를 감추기 위한 연기였다고 했다. 혹시라도 자식들이 놀림을 받을까 노심초사 짧은 다리를 숨겨왔다. 그래서 엄마의 신경이 예민했던 것 같다.

일생 엄마의 깊은 트라우마를 우리들은 아무도 몰랐다. 엄마란 그저 엄마이면 되는 줄 알았다. 예순 살 무렵부터 관절염을 앓아서 요즘도 걸음이 조금 이상한 줄 알았다. 성장이 끝나지 않은 소녀의 발은 균형이 무너졌다. 오른발이 턱없이 크다. 오른발에 맞추어 산 왼발의 신발은 걸핏하면 벗겨지기 일쑤지만 우리는 별 신경을 안 썼다. 여섯 자식 중 누구 하나 엄마의 발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스스로 죄인인 양 늙은 엄마는 수년 전부터 더 이상 감추지 못한다. 여든 일곱살의 엄마는 절름절름 걷고, 나의 분노는 엄마의 어깨에서 흔들린다.

편집 : 김유경 편집위원

 

이미진 주주통신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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