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의 위치 변화과 새문안길의 명칭
왕복 8차선의 새문안길이 정동길이 끝나는 곳을 가로지른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서대문로로, 1950년 신문로로 불리더니 1984년에는 새문안길이 돼 오늘에 이르렀다. 모두 ‘돈의문(敦義門)’의 별칭이다. 그런데 정작 서대문의 정식 명칭인 ‘돈의문’은 길의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요즘 돈의문을 서대문이라고 부르지만, 태조 때는 그 속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태조 때 흥인문은 동대문으로,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흔히 불렸다. 돈의문과 숙정문은 각각 정서문과 정북문으로 불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서대문이나 북대문이라는 속칭은 찾기 힘들다.

돈의문의 옛터는 어디일까? 경향신문사 옆 새문안길 건너편 언덕 위를 보면 강북삼성병원이 보인다. 강북삼성병원에 들어가기 전, 콘크리트 보도 난간을 보면 나무판을 짜 맞춘 담장 비슷한 것이 있다. 거기에 돈의문 자리임을 표시한 표지판이 있다. 공공미술작품 ‘보이지 않는 문’이다. 이 표지판에는 ‘돈의문 터 1422-1915’라고 적혀있다. 1422년부터 1915년까지 이 자리에 돈의문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1422년은 세종 때고 1915년은 일제강점기다. 이 자리는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봤을 때 경복궁의 우백호인 인왕산의 지맥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갯마루를 택하고 있다. 따라서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 고갯마루는 돈의문이 있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맨 처음 돈의문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태조 5년(1396) 도성 축성 당시에는 돈의문이 지금의 자리보다 한참 위인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다. 이를테면 사직터널 위가 되는데, 이곳은 운종가에서 정서 방향으로 난 길이었다. 그러다가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기존 성문은 폐쇄되고 더 남쪽으로 옮겨졌다. 이때 성문 이름도 서전문(西箭門)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태종 13년 6월 19일 실록 기사에는 ‘신문(新門)을 성의 서쪽에 열어서 왕래에 편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전문의 입지 선정 당시 처음에는 당대 권신이었던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의 집 앞에 세우려 했는데, 이숙번이 인덕궁(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했던 궁궐) 앞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해 자신의 집 앞에 성문이 세워지는 것을 막았다. 하륜과 더불어 태종 등극의 일등 공신이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서전문은 10년이 채 못 돼 다시 폐쇄됐다. 세종 4년(1422) 2월 23일 기사에 ‘서전문을 막고 돈의문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병기된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당시는 토성을 석성으로 수축할 때였다. 공공미술작품 ‘보이지 않는 문’에 적힌 시작 연도가 1422년인 까닭이다. 따라서 지금의 돈의문 자리는 세 번째 자리다. 사람들은 태종 때 새로 지은 서전문을 ‘신문’이라고 했고, 세종 때 지은 돈의문도 ‘신문’이라고 했다. 신문을 향해 낸 큰길은 ‘신문로’라고 불렸다. 이러한 연유로 서대문 안도 ‘새문안’이라고 불렸고, 그 길은 ‘새문안길’이 됐다.

돈의문 문루는 축성 초기부터 있었을까? 중국 사신이 드나들었다고 해 태조 때부터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태조 때 문루가 건설됐다는 기록은 없다. 숙종 때에야 돈의문 문루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숙종 37년(1711) 6월 3일, 광희문의 홍예문 축조가 끝난 후 광희문 문루를 먼저 올리려다가 재목이 모두 준비되지 않아 금위영에서 다음에 올리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숙종은 그 재목으로 돈의문 문루를 먼저 올리도록 했다. 이로써 정서문인 돈의문은 흥인문과 숭례문에 이어 세 번째로 문루가 있는 성문이 됐다. 도성 축성 이후 316년 만의 일이었다.

돈의문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종 36년(1899) 돈의문으로 전차가 다닐 때만 해도 성곽은 헐리지 않은 상태였다. 1915년 일제의 시구역개수계획(市區域改修計劃)의 일환으로 전차 궤도 복선화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돈의문이 헐리고 말았다. 이때 일제는 돈의문을 경매에 부쳐 팔았는데, 염덕기라는 사람이 단돈 205원에 낙찰 받았다. 문루를 헐 때 그곳에서 불상 등 여러 가지 보물이 나와 염덕기는 횡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낙찰자는 목재만 가져갔다. 홍예문 등 석재는 도로의 개수에 사용됐고 그 부속물 일부는 고고학 참고자료로 쓰기 위해 총독부에서 영구보존한다는 기사가 1915년 3월 7일 자 매일신보에 났었다.

인부들이 거대한 홍예의 석재를 무너뜨릴 때는 ‘슬프다. 꽝! 하고 땅을 울리더라’는 6월 11일 자 매일신보의 기사처럼 돈의문의 마지막은 지축을 울리는 통곡과 함께 무너졌다. 그 굉음은 뿌리째 뽑히는 조선 왕조의 허망한 단말마와 같은 것이었다.

▲ 돈의문 터 표지판

 
경교장(사적 제465호)
종로구 평동 현재 강북삼성병원 동편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단정한 2층 건물이 보인다. 병원 본관 건물과 붙어있어 본관의 부속건물처럼 보이지만 이 건물이 경교장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금광으로 횡재한 친일파 거부 최창학이 지은 별장이었다. 광복 후 그는 이 집을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기증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점 등 그의 친일 행위를 덮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원래 이름은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竹添莊)’이었다. 전 일본공사의 명칭을 딴 명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김구는 근처 만초천에 있는 다리 ‘경구교(京口橋)’의 약칭인 ‘경교’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광복 정국에서 이 저택은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건국활동의 3대 중심지가 됐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11시 30분경 집무실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김구는 이곳에서 광복 후의 건국활동, 반탁과 통일운동도 이끌었다. 특히 이곳은 상당 기간 임시정부공관과 한국독립당 본부 구실을 했고, 김구를 따르는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엄항섭 등 임정 요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남북 협상의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하기까지 이곳에는 많은 정치인이 집결했다. 7월 5일 광복 후 첫 국민장으로 발인할 때는 당시 최대의 인파가 거족적으로 이곳에 몰려들어 효창공원으로 떠나는 김구를 애도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김세연이 설계해 1939년 고전주의 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의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정면 중앙 1층에는 승‧하차시설을 갖춘 현관이 설치돼 있다. 당시엔 당구실과 이발실까지 내부에 있는 초호화건물이었다.

현재 이 건물 2층 과거 김구의 집무실에는 암살범 안두희가 총을 쏠 때 서 있었던 위치가 표시돼 있고 총알이 관통했던 유리창 모형이 재현돼 있다. 시해장소에는 피살 당시의 피 묻은 옷과 관련 사진도 전시돼 있다. 집무실 한쪽에 김구의 흉상도 있다. 지하 공간에는 백범기념관도 마련돼 있다.

김구가 서거한 후 경교장의 소유권은 다시 원주인인 최창학에게 돌아갔다. 그 이후 대만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가 주둔했고 휴전 후에는 월남대사관저로 사용됐다. 1967년 삼성이 매입해 지금의 강북삼성병원이 됐다. 삼성이 인수한 후에도 고려병원을 지으면서 헐릴 뻔했고 1996년 2월 병원 증축 때도 헐릴 위기가 왔으나 그때마다 여론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경교장은 서울시가 2001년 4월 6일 서울시 문화재 제129호로 지정했다가 2005년 6월 13일 사적 제465호로 지정해 보호받고 있는 역사문화유산이다.

▲ 경교장 전면
▲ 김구 선생 집무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거실(집무실)’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 암살범 안두희가 쏜 총탄 자국이 선명한 김구 주석 침실의 유리창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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