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과자 먹고 싶어.”
통화할 때마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저번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혼자 지서리에 갔다 왔어. 그런데 10원이 모자라서 한 개밖에 못 먹었어” 합니다.

휴! 공동체가 있는 운산리에서 버스정류장과 구멍가게가 있는 지서리까지는 걸어서 꼬박 40여 분이 걸립니다. 그 길을 혼자서 다녀왔다고 합니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운 날에요. 아무튼 통화할 때마다 이것이 먹고 싶다, 저것이 먹고 싶다고 쭉 열거합니다.

“(보름에 한 번) 외출하는 날에 부안에 가서 사 먹으면 되잖아” 하면 “응. 그런데 지금 먹고 싶어” 하거나 “돈 아깝잖아”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먹고 싶은 걸 말만 하지 말고 쭉 적어놔. 방학하면 아빠가 다 사줄게” 하니까 알았다고 합니다.

변산공동체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맞은 여름방학.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집에 가자고 합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다 사줄게” 하니까 없다고 합니다. 대신 USB랑 휴대용 스피커를 사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엄마랑 재잘재잘. 콩밭 매기가 얼마나 힘든지 토로합니다. ‘쟤가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늦잠을 잡니다. 샴푸로 머리를 감으니까 머릿결이 부드럽고 냄새가 좋다면서 킁킁거립니다. 통화할 때와는 달리 무얼 먹겠다는 말도 없고 밥 먹는 것도 시들합니다.

“다향아. 학교에 있을 땐 이것저것 먹고 싶다더니 왜 말이 없어?”
“아빠. 일하지 않아서 그런지 밥맛이 없어.”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 귀 뚫어도 돼?” 귀를 뚫겠다고? 이제 귀고리를 하고 싶어하는 걸 보니 어린애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아빠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네가 꼭 하고 싶으면 해.”
“정말?”
“그럼, 정말이지. 언제 아빠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아니. 아빠, 귓불이 얇으면 괜찮은데 도톰하면 아프대. 그런데 난 도톰하잖아. 어떻게 하지?”
“…….”

다향이의 말을 듣고 귀를 뚫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2학년 장마방학-친환경농사공동체인 만큼 비가 내리면 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봄방학처럼 장마방학을 하지요-을 맞아서 집으로 돌아온 다향이 귀에 피어싱이라는 게 달려있었습니다. 생일선물로 피어싱을 받고 싶다고 했더니 공동체의 중고등부 아이들이 하나씩 선물해줬다고 자랑하면서요.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서 집으로 돌아온 다향이가 온종일 빈둥빈둥. 학교에 다니기 전처럼 다시 잠을 12시간 가까이 자고 텔레비전에 푹 빠져서 지냅니다. 도서관에 가자고 해서 데리고 가면 인터넷으로 소녀시대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음악을 듣습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없고 휴대폰 반입도 금지되는 학교에서 많이 굶주렸구나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아빠로서 전혀 답답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놀다가 지치면 뭐라도 하겠지’ 생각하고 내버려뒀습니다. ‘겨울방학 동안에 하고 싶은 거 있니?’ 했을 때 ‘영화를 실컷 보고 영어 공부도 하고 싶다’고 했지요. 적어도 영화는 원 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영화관에도 자주 가고 교보문고에서 사온 명화(다향이가 재미없다는 흑백영화)도 열 편 가까이 봤지요.

그사이 조금 날씬해졌던 몸이 다시 불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다향아, 새해부터는 승마를 배워볼까?” 했더니 좋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향이의 승마강습이 시작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말을 탔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수영을 해서인지 처음부터 자세가 좋다며 칭찬을 받은 다향이가 열심히 합니다. 승마 전후에 말의 목덜미를 두드려주고 또 목덜미를 쓸어주기도 합니다. 당근을 수확한 밭에서 남은 것을 주워뒀다가 말에게 갖다 주기도 합니다.

말을 좋아하는 다향이. 아니 말뿐만 아니라 개나 고양이는 물론이고 햄스터나 물고기, 심지어 뱀을 봐도 예쁘다고 쫓아가는 다향이입니다. 아이한테 슬쩍 물어봤습니다. “다향아, 2월 말이 되면 학교로 돌아가잖아. 그러면 다시 여름방학 때나 말을 탈 수 있을 테니까 강습만 받지 말고 승마장에서 온종일 지내보는 건 어떨까? 교관님과 함께 지내면서 똥도 치우고 안장을 얹었다가 내리는 것도 익히고 또 손님들의 고삐도 잡아주면서 말에 대해서 더 알아보는 거 말이야.” 잠시 망설이던 다향이가 승마장에서 때때로 강습을 넘어선 체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홈스쿨링을 할 때가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제자로서 동시 외우고 쓰기, 피아노 치기, 그림 그리기, 영화 보기, 사진 촬영, 배낭여행을 하던 아이가 차츰 나의 동반자로 변모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말을 한 마리 살까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다향이가 말을 기본적으로 잘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말똥과 목욕을 비롯한 완벽한 관리까지 도맡는다는 전제로 말입니다. 그 준비가 되면 말을 사줄 테니까 매일 말을 타고 5km 떨어진 표선해수욕장까지 다녀오라고 했지요.

아빠 혼자서 상상했었습니다. ‘다향이의 성인식 기념으로 공동 시집과 동화를 발간하고 그림과 사진전을 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을 단기간에 한다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놀이로 접근하고 그중에 빼어난 것들만 추린다면 부담이 없겠지요. 그래서 ‘제주에 가면 말 타는 처녀 시인(詩人)이 있다더라.’, ‘아니 말 타는 처녀 화가 혹은 사진작가가 있다던데’ 하는 소문이 나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또래의 아이들이 전국에서 찾아올 것입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다향이의 친구로서 대접할 것이고 다향이는 어디에 가도 반갑게 만날 친구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친구들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고 곧 국외로 확장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다향이가 변산공동체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가졌던 계획이었습니다.

아니, 입학식 한 달 뒤에 다향이를 만나러 갔을 때 싫다고 하면 집으로 데려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한 마리 사서 이 멋진 계획을 실천해볼 생각이었지요. 제가 부자라서가 아니라 제주에서는 탈 만한 말을 이삼백만 원이면 살 수가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다향이는 공동체에 계속 남겠다고 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영영 멀어진 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방학 기간만이라도 승마랑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열심히 한다면 가능한 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지요.

“아빠는 이렇게 계획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싫어. 난 글쓰기랑 그림 그리기가 싫어.”
한마디로 잘라버립니다. 하!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동안 준비해온 게 아깝기는 하지만 제 인생은 제가 사는 것이니까요.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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