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의 상림은 한국 최초의 인공조림 활엽수림이다. 신라 진성여왕 때 태수로 있던 최치원 선생이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심은 애민정신의 숲이다. 천년의 시간을 지나온 아늑한 숲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의 즐거움을 준다.

33년 직장생활을 끝내던 가을에 상림을 처음 만났다. 거친 표피 속에 세월을 품고 우뚝 선 거목들 사이로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또르르 피아노를 두드리고 나뭇가지는 부산하게 지낸 시간을 증명하듯 그렇게 수많은 잎을 날리고 있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나는 세월에 허무하게 스러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내가 젊을 때에는 강물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었으나 이제는 강물과 같은 속도로 걷는다. 매끄럽고 부드러웠던 내 피부도 나무껍질을 닮아 간다.

숲은 조용하지만 겨울 준비로 부산하다. 천개의 잎은 천개의 문제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알려준다. 영양분을 뿌리로 내려보내고, 잎을 떨어뜨린 뒤 수액을 진하게 하여 부동액을 만드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잎들은 스스로 나무를 떠난다. 나누고 비우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잎이 떠난 자리 끝에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이 걸렸고 나무들은 만세를 부른다.

오솔길 모퉁이를 돌자 실개천이 노래한다. 바람이 웃으며 지휘를 한다. 숲은 말없이 온몸으로 개울물을 붙잡고 있었다. 참나무 가지 위에서 졸던 산새 한 마리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간다. 절대로 두번 가지 않는 길이다. 사라지는 것들은 가는 길이 있지만 돌아오는 것들은 길을 준비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뿐, 결코 사주팔자를 탓하지 않는다. 고목은 스스로 죽어가고 숲은 내일을 예비하며 도토리들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숲의 경계 너머로 내가 갈 길이 보인다.

이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지만 나누고 비운 뒤에 다가오는 시간은 두렵지 않다. 겨울은 쉼표지 마침표가 아니다. 삶은 느리지만 계속된다. 가늘어지는 햇살 속 나뭇가지는 앙상해도 내일의 새순을 숨겨두었다. 숲은 시간에 묻히고 날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내 한숨도 숲에서 잦아들었다.

남기선  hani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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