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옛집
송월길은 서울복지재단 담장 밑에서 송월 2길과 갈라진다. 송월길과 송월 2길 아래에선 현재 교남뉴타운(경희궁자이)의 개발 작업이 한창이다. 상전벽해라더니 옛날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을씨년스러운 착암기의 굉음만 사방에서 진동한다. 거기서부터 월암공원의 언덕이 시작되고 송월 2길을 계속 따라가면 월암근린공원 끝자락에서 예스러운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이 홍난파(洪蘭坡)의 옛집이다. 집 입구 서쪽엔 가파른 계단이 있고 공원길을 따라 들어가면 곧장 현관에 이른다. 현관문 옆 벽체에는 등록 문화재 제90호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집 앞마당에는 홍난파의 흉상이 서 있고 흉상 아래 안내판에는 설명이 길게 적혀 있다.

그의 본명은 홍영후라는 것. 그는 이 집에서 1936년부터 1941년까지 말년의 5년간을 살았다는 것. 이 집은 지하 1층, 지상 1층의 붉은 벽돌건물이라는 것. 당시에 독일계 선교사용 주택으로 지었기에 벽난로, 침실, 복도가 있는 등 서양식 주택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것.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국내 최초로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다는 것. 1936년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취임해 경성방송관현악단(현재의 KBS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했다는 것.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7살 때 했던 첫 결혼은 28살에 부인과 사별하면서 끝이 났다. 9년 후 37살에 그는 소프라노 가수 이대형(李大亨)과 재혼했다. 당시 결혼생활을 위해 마련한 것이 이 집이었다. 1940년 7월 ‘여성’ 잡지에 기고한 ‘암정(岩庭)’이라는 수필에서 그는 홍파동 집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다. 바위뿐인 집터에 흙을 부어 정원을 만든 뒤 정원 가꾸기에 취미를 들였으며, 일요일이나 일이 없는 날에 가위로 전정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 가정에서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짧았다. 1941년 4월, 10년 전에 앓았던 늑막염이 재발했고 결국 그는 8월 30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44세였다.

그의 학력과 경력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작곡가요, 바이올린 연주자요, 지휘자였다. 1912년 YMCA 중학부를 졸업한 후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했다. 졸업 후 다시 기악과에 입학해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8년 일본에 유학 가서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문사 기자 생활도 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다녔다. 1926년 일본 도쿄고등음악학원에 편입해 도쿄교향악단(지금의 NHK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해 ‘조선동요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했다.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를 역임했으며, 빅타레코드사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동년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이화여전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100곡집’ 하권을 발간했다. 1937년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했다. 곡명은 모차르트교향곡 41번 ‘주피터교향곡’이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다양한 이력이다. 그의 이력을 자세히 살펴본 건 식민지 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봄으로써 어떤 이는 핍박받은 애국의 길을 걸었고 또 어떤 이는 시류에 영합해 친일의 길을 걸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작곡한 여러 음악 중에서 국민 애창곡으로 뽑히는 건 가곡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 ‘옛 동산에 올라’, ‘봉선화’ 등과 동요 ‘고향의 봄’, ‘개나리’, ‘할미꽃’ 등이다.

근년 그의 친일 행위가 문제시되고 있다. 그는 조선문예회 등 친일단체에서 활동했고 친일 성향의 곡과 글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난파음악상을 받은 음악가(작곡가 류재준)가 그의 친일 행위를 문제 삼아 수상을 거부했다. 여하튼 홍난파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생애 동안 영광을 누리고 갔다. 사후에도 그의 영광은 계속되고 있다. 월암공원 북서쪽에는 홍난파음악공원이 꾸며져 있다. 거기에 ‘고향의 봄’과 ‘봉선화’의 악보가 안내판에 새겨져 있다. 그의 사후 명성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가 오로지 민족의 애환을 노래했다는 과잉 찬사는 재고해 바로잡아야 마땅할 일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홍파동(紅把洞)이라는 동 이름이 홍난파(洪蘭坡)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홍파동 동네 이름의 한자와 홍난파라는 이름의 한자가 다른 데서 알 수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곳에 홍문동과 파발동이 있었는데, 그 두 동을 합하면서 앞 글자 한 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 홍파동이다.

▲ 홍난파 가옥과 홍난파 흉상

배설(Ernest Bethell, 한국명 裵說)의 옛 집터
그렇다면 구한말 누구보다 치열하게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을 사랑했기에 목숨까지 바쳤던 배설의 옛집은 어디로 갔는가? 홍난파 옛집과 배설의 옛 집터는 거리가 30m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지척이다. 그러나 친일파의 옛집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그의 사후 명성처럼 대우받고 있는데 애국자 배설의 옛집은 자취마저 사라지고 없다.

배설의 옛집은 홍파동 2-4번지다. 지금은 월암공원에 편입된 지번인데, 도성 성곽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옛 사진을 보면 벽체는 붉은 벽돌을 쌓고 지붕은 한옥으로 올린 절충식 한옥이었다. 대지 1,983㎡에 건평은 약 330㎡ 정도 되는 널찍한 집이었다. 이 집은 구한말 배설이 창간한 항일신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이자 발행인 배설의 집이었다. 그 집 일대는 고종이 그에게 하사한 자리였다.

그는 노일전쟁 중인 1904년 3월 영국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신문의 특파원으로서 한국에 왔다. 노일전쟁을 보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 본국 신문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사표를 낸 후 일제에 의해 고통받는 한국 국민의 편에 서서 투쟁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으로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한 조선의 처지에 공감해 1904년 7월 18일 민족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창간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됐다.

그 신문은 일제의 사전검열을 받지 않는 유일한 신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서구열강의 대통령과 원수들에게 일제의 강압적 침략 정책을 폭로했다. 고종의 헤이그 밀사 사건,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친일파 스티븐슨 응징 등을 보도하면서 의병의 구국 투쟁에 불을 붙였다.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었고 신민회와 같은 항일비밀결사의 기관지 역할도 했다. 이 신문은 그 당시 일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인 명의의 신문이었기에 일제의 검열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을 누렸다. 그러므로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등 당대 애국자들의 목탁 구실을 했다. 이 신문의 진실한 보도는 성가를 높여 그 부수가 한때 1만 부를 넘었다.

일제 통감부는 그가 회유를 거부하자 간첩 행위를 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6개월 금고형에 처했다. 이어 그를 한국에서 쫓아내려고 동맹국인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고, 결국 1907년과 1908년 그는 두 번이나 영사재판에 회부됐다. 대법원판사가 상해에서 서울까지 와 재판을 진행했다. 그는 영국 군함에 실려 상해로 이송되고 상해교무소에서 3주간 금고형을 살았다. 형기를 마치고 한국에 와서 1909년 5월 심장확장증으로 타계했는데, 이는 상해에서 한 열악한 감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죽기 전 그는 총무였던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나는 죽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해 한국 동포를 구하시오”라고 유언했다.

그의 두 번째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 5월 27일, 신문발행인 직은 영국인 A.W.만함에게 넘어갔다.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발행됐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배설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영국으로 귀국했다. 남편이 아끼던 신문은 처분했다.

이후 배설의 옛집엔 안식교 선교사 리켄트가 세를 들어 살았다. 1924년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전 교수로 있던 안동원 씨가 리켄트로부터 2,500만 원을 주고 샀다. 안동원 씨의 아들 안영식 씨도 아버지에 이어 배설의 옛집에서 살았다. 안 씨 부자는 1971년 배설의 옛집이 기념관이 된다면 시가만 받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배설 기념관 설립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지금 월암근린공원 석촌빌라 앞에는 배설의 옛집이라는 원형의 안내판이 그 위치만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이제라도 배설의 옛집과 그에 관한 기록을 복원하는 방법이 없을까?

▲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제에 항거한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배설))의 옛 집터 표지물

구절양장의 송월동 다세대주택 골목
배설이 살던 집터의 표지물이 있는 곳에서 전진해 홍난파음악공원에 들어서면 성곽 유구는 자취를 감춘다. 음악공원을 지나 빌라촌 사잇길로 들어선다. 왼쪽으로 새문안빌라를 지나 오른쪽으로 세원빌라가 이어지고, 아래쪽으로는 구세군 영천영문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송월 4길의 시작이다. 거기로부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세원빌라와 홍파빌라 사이 주차장 안쪽 담벼락에서 성돌이 보인다. 빽빽한 건물 사이로 시멘트 담장 밑에 깔린 성돌은 숨이 막힐 듯하다.

문화재 주변의 건축규제를 지키지 않고 지은 다세대주택들이 버젓이 들어서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성곽은 국가 지정 문화재다. 해당 문화재의 건축규제 대상지는 문화재 경계에서 100m까지로 정해져 있다. 이 범위 안에서 건물을 지을 때는 문화재보호구역 지표면에서 3.6m 높이를 기준으로, 앙각(仰角)은 27〬선 이내에서 짓도록 규정돼 있다. 성곽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러한 건축 규제를 무시한 것일까? 그러나 성곽의 자취는 엄연히 존재한다.

홍파빌라에서 송월 4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곧 송월2길과 다시 만난다. 그러나 길에 표시가 없으므로 구절양장 같은 다세대주택 사이를 헤치고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오른쪽으로 광영주택이 나오고 왼쪽에 정우빌라가 보인다. 정우빌라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 길 아래로 상록수어린이집이 보인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동쪽으로 양의문교회가 나오고, 그 교회 앞길을 따라 근년에 복원된 성곽이 보인다. 그러나 복원된 성곽은 50m도 안 가서 한국사회과학도서관 앞 소방도로에서 또 잘린다. 성 밖의 행촌동과 성안의 사직동을 왕래하는 소방도로를 냈기 때문이다. 길모퉁이 편의점(옛 옥경이식품가게) 앞 소방도로 북쪽부터 성곽은 완전한 모습을 보인다.

▲ 송월동(행촌동) 다세대주택 주차장 안에 보이는 담벼락의 성돌 유구

편집: 정지은 편집담당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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