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전 이야기다. 결혼을 하고 그 이듬 해 4월 말. 봄 휴가를 받았는데 남편하고 일정이 맞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출근한 남편만 기다리며 푹 쉴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미혼의 직장 선배 샘들이 나를 꼬드겼다. 내 신혼 이야기를 할 때면 무심하고 눈치 없는 울 남편을 흉보며 “야.. 너... 안 그렇게 봤는데.. 왜 그렇게 사냐?” 라고 나를 구박했던 그 선배들이 남편을 버리고 지리산에 가자고 날 부추켰다. 그렇게 해야 새색시 귀한 줄 안다면서...

그 때의 지리산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비가 흠뻑 오던 날, 선배들을 앞에 보내고 한참 뒤에 쳐져 홀로 걷던 길고 긴 적막한 능선 길. 내 머리 위까지 올라온 풀숲 속에서 눈앞에 온통 빗물이 흩날리던 그 때, 잠시 이 세상인지 저 세상인지..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순간적 경험을 한 후 지리산은 더 이상 그냥 산이 아니었다. 마치 먼 옛날 내가 살아 숨 쉬며 그 자락에서 살았다가 흙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그 자락에서 생명을 얻어 둘러보게 된 나의 고통스런 고향 같았다.

까닭 모를 슬픔이 밀려왔다. 이병주의 <지리산>을 막 읽고 가서 그랬을까? 누군지 모르는 그들의 피맺힌 눈물이 내 맘으로 젖어들어 오는 것 같았고, 누군지 모를 연인들의 애절함이 내 맘 속에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그 후 지리산에 수차례 갔지만 다시는 그 독특하고 신비한 경험을 하지 못했다. 내 영혼이 탁해져서 그런가... 세상 삶에 너무 집착해서 그런가... 생각하면서 언젠간 나이 들어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아이들이 성장해서 제 갈길을 가면 지리산 어느 한적한 산골 마을에서 조그만 토담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는 막연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지리산 산골 마을을 쉽게 둘러볼 수 있는 300km 둘레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하!!! 했다. 지리산둘레길를 슬슬 돌다 보면 내가 살고 싶은 마을을 한 눈에 딱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전초전으로 둘레길 최고의 코스라 하는 3코스 중 매동마을에서 시작하여 벽송사까지 13km를 걸어보았다.

▲ 매동마을을 뒤에서 감싸주고 있는 소나무 숲
▲ 한걸음 한 걸음 가다 만나 구절초
▲ 새털구름인데 남편은 살치살 같다고 한다. 얼마나 고기를 사주지 않았으면...
▲ 추수가 끝난 허전한 논과 그 옆 논둑 위에 친구처럼 있어주는 억새
▲ 상황마을의 다랑논
▲ 그야말로 황금 들녘. 어찌나 색이 곱던지...
▲ 등구재에서 창원마을로 내려가면서 본 다랑논,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할 곳에 지리산 다랑논이 있다던데.. 여긴지.. 아닌지...

▲ ‘조’인가? 도시에서만 자란 나는 ‘조’인지 ‘귀리’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익어가는 곡식이 풍성하면서도 고단하게 느껴진다.

▲ 창원마을을 지나 금계마을로 넘어가면서. 여기도 다랑논 천지
▲ 수수를 털고 계시는 아주머니. 바쁜 농사철에 철없이 세월아 네월아 구경 다니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 의중마을의 윗당산. 지리산을 바라보며 재를 올렸던 곳이다.
▲ 의중마을에서 벽송사로 가는 숲길
▲ 벽송사 절 뒤로 보이는 소나무 숲에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두 소나무. 도인송과 미인송이라고 한다.
▲ 천년이나 된 두 소나무. 아래 나무가 도인송이고 위에 나무가 미인송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습이 달라지겠지만 마치 미인송이 도인송을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쌍의 나무가 천년을 함께 했다면 나무에도 영이 깃들어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 나누며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70년 전에 세워져졌다는 벽송사 목장승. 민속자료라고 한다. 일반 장승하고 좀 다른 모습이다. 툭 튀어나온 왕방울 같은 눈, 뭉툭한 코와 쩍 벌어진 입. 좀 해학적인 모습을 갖고 있어서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왼쪽 장승은 그만 산불이 나서 머리 부분이 타버렸다. 아까비...

우리는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지리산길 인월센터를 찾아 지도나 숙박 등에 대한 안내를 받아서 수월하게 지리산 걷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연락처는 063-635-0850이다. 또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www.trail.or.kr)에 가면 인월센터 뿐만 아니라 산청센터, 하동센터, 구례센터, 함양안내소 등 모든 정보가 다 나와 있다.

▲ 지리산 둘레길 코스

 지리산둘레길 지도에 이런 글이 있다.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 - 레베타 솔릿, [걷기의 역사]

나도 올 가을에 마음 여행 많이 해야 하는데...

* 첨언 : 이 글은 몇 년 전에 다녀와서 쓴 글이다.

* 지도사진 출처 : 지리산둘레길 홈페이지 www.trail.or.kr

김미경 편집위원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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