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이미진 주주통신원

지구상의 모든 생물 중 가장 우위에 있는 고등생물이 인간이다. 인간이 최초의 생명으로 잉태되었음을 타인에게 전달함은 소리다.

심장의 박동소리, 엄마의 ‘집’에서 건강히 살아있음의 신호다. 이 때 엄마의 자궁은 악기가 된다. 비록 단순한 음이지만 엄마와 아기 사이의 소통이다. 깊은 ‘방’에서 자라는 아기도 바깥의 모든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태교음악을 들려준다. 임산부는 남과 다투지도 말고 좋은 말만 골라 들어야한다. 소리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교훈이다.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살아있음의 증명을 소리로 표현한다. 심지어 해질녘 피는 선인장 꽃조차 꽃잎이 열릴 때마다 탄생음을 뿜는다.

아기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발휘되는 인지능력이 청력이다. 유아들의 장난감은 모양보다 소리가 우선이다. 눈을 떴지만 사물의 분별력은 서서히 점차 발달한다. 엄마아빠들은 언어가 아닌 온갖 소리로 아기의 관심을 일깨운다. 말보다 소리에 가까운 원시의 형태, “우르르르륵, 깍꿍!”이라는 음절은 일정한 파장으로 입력될 것이다.

요즘 들어 유행하는 태명도 아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계 맺기에서 비롯된 소리다. 모든 태명에는 분명 경쾌한 악상이 들어있어 한없이 발랄하고 더없이 사랑스럽다.

바람에 흩날리는 미루나무의 이파리, 맑은 물이 조약돌 위로 굽이치는 냇물, 소복이 쌓인 눈길을 밟는 발자국 소리,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건 슬픈 일이다.

인간에게 닥친 모든 장애가 다 안타깝지만 청각장애의 침묵은 완벽한 공허다. 이런 경우 비장애의 일반인들은 쉽게 동정을 표현한다.

갸륵한 마음이야 탓해서 안 되지만 청각장애가 정신세계의 가치까지 폄하하진 못한다. 가끔은 경솔한 동정이 교만일 수도 있다. 남의 아픔이 나의 행운으로 환치되어서도 안 된다.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실만 우리는 깊이 감사하며 살아야한다.

태초에 소리가 있어
태초에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바다가 출렁이고, 땅이 갈라지고, 산이 솟구치고 모든 만물이 소리의 기척 없이 태어날 리 없다. 자연에서 소리를 배운 인간은 흉내 내기를 했다. 새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소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원시의 인간에서 현대문명을 발전시키며 사람들은 자연에서 실내로 소리를 가지고 들어와야 했다. 그토록 익숙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그리웠다. 늘 가까이서 듣고 싶은 소리의 그리움이 악기를 창조하게 했다.

동물 중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간은 자연의 소리를 훔치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 필요불가결한 악기가 아름답게 탄생시킨 것이 음악이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한한 축복 속에서 서양음악의 길고 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이 이룬 역사 중 가장 고귀한 예술 중에서 음악이야말로 자연과 밀접한 형성관계다. 음악은 예술의 장르에서 가장 근원적인 자연발생적 미학을 추구한다.

글을 쓰거나 읽고, 그림을 그리거나 보면서, 춤을 출 때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의 특징이다. 모든 시각예술의 근원에 청각예술인 소리만이 완벽하게 접합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글도 스스로 소리 내지 않으며, 아무리 잘 그린 그림도 시종 침묵하며, 춤은 소리의 발현을 대체한 행위예술이다. 범세계적인 모든 행사에는 음악이 연주된다. 첫 해, 첫 날 가장 먼저 연주되는 음악회는 인간의 감수성과 가장 밀접한 예술임을 인정한 것이다. 출생의 첫 울음소리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소리가 있다. 소리는 우리의 생과 사, 그 자체이며 그 모든 과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일생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바름을 지향한 사람의 소리와 일생 돈을 쫓느라 교활함에 능숙한 사람의 소리는 어떻게 저장될 것인지…….

머나 먼 바람의 흔적처럼 
여기, 소리를 따라 먼 길을 돌고 돈 사람이 있다.
식탐의 결과인 살집이 없어 큰 키가 더욱 허청하고, 소리에 영혼을 팔아 허수아비처럼 허허로운 한 남자, 65세의 황경환씨.

소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만든 소리 아비다. 우리의 아비가 하나이듯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소리박물관을 만들었다.

‘오르골소리박물관’
대체 어떠한지 궁금하긴 했다. 경주IC의 입구에 위치한 ‘경주휴게소’ 안에 있다. 고속도로에서 들어올 때면 곧장 집으로 갈 생각만 하느라 지나쳤고, 한번쯤 맘먹고 가려다가 늘 바쁜 일상에 쫓기며 미루었다.

드디어 취재가 일이 되자 참았던 궁금증이 한꺼번에 몰려와 서둘렀다.
소리를 모은 사람을 만나는 일에 어떤 선입견도 가질 수 없어 막막했다. 그건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아비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생소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는 소리 뿐 아니라 종교에도 일가견을 이룬 학자였다.
불교의 근본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불교는 깨달음의 과학’과 ‘반야심경’ 저술자.

초기 불교에 심취한 동국대 평생교육원 교수였다.
늦가을 외딴 길에 서성이는 키 큰 미루나무처럼 잘 물든 한 남자.

그에게선 태초의 늪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민감했다.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외부의 잘 소리를 듣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할 일은 자신의 소리를 죽이는 일이다. 비워버린 자신의 내면에 들어차는 것은 외부의 소리다. 이 행위는 받아들임이다. 내침은 불화의 거부이고, 받음은 모심의 융화다. 자연의 모든 소리들이 아름다운 하모니가 되어 그를 키웠다.

다 자란 그는 일정하지만 다양한 자연소리너머의 소리도 궁금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소리의 결정인 악기를 찾아 나섰다.

국내에서 채우지 못한 호기심이 외국을 향했다.
맨 처음 그를 매료시킨 것은 ‘오르골’이었다. 짧고 단순한 음악이지만 그래서 또 듣고 싶어지는 ‘뮤직박스’가 ‘오르골’이다.
옛날 외국의 로맨스영화에서 자주 등장한 것이 바로 ‘오르골’이다.

사랑을 맹세하는 반지를 넣거나, 결혼을 허락받는 프러포즈에서 보석함의 역할로 잘 어울렸다. 인간에겐 다른 동물에게 없는 대리만족이란 감정이 있다. 그래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행복한 순간에 이르면 감정이입으로 열광한다.

나도 수 차 그런 경험을 했다. 사랑의 고백을 받는 여자주인공처럼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른 상태가 되었을 때 남자가 건네주는 아름답고 자그만 선물 박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짜릿한 긴장감이 팽배될 때, 뚜껑이 열리면 예쁜 인형이 나오고 너무나 맑고 고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미 음악소리에 홀려, 정작 내 것 아닌 보석 따위는 뒷전이었던 기억. 여성이라면 누구나 그런 장면을 꿈꾸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설레임을 주던 그 물건이 바로 ‘오르골’ 즉 ‘뮤직박스’다.

연인이 그리울 때면 태엽을 감아 뚜껑을 열고 고운 선율에 취하던 여자주인공을 따라 자꾸 듣고 싶었던 음악.|
회상만으로도 행복감에 취한다.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꼭 한번 받고 싶은 ‘오르골’. 낭만에서 자꾸 멀어지는 세상….

소리의 이끌림은 행복한 방랑
그는 가까운 일본에서 먼 유럽까지 모든 ‘오르골’의 소리를 찾아 헤맸다.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명품 ‘오르골’은 유럽이 으뜸이었다. ‘오르골’은 단순히 듣기만하는 음악이 아니다.

‘오르골’소리의 고주파(10만2천Hz)와 저주파(3.75Hz)는 뇌의 중추신경인 뇌간을 자극한다. 우리 몸의 가장 건강한 때로 돌아가게 만드는 뇌간은 자율신경과 호르몬분비를 정상화한다. 그래서 ‘오르골’은 단순한 ‘뮤직박스’의 기능을 넘어선 치유의 역할도 한다.

‘오르골’에서 나온 음악의 울림은 저항력과 면역성을 키워 우울증과 정서불안에 각별한 효능을 발휘한다. ‘오르골’음악의 특징은 천상의 소리처럼 맑고 청아하다. 어둡고 칙칙한 절망이 침체된 무거움이 아니다.

온 세계를 돌며 더 많은 소리를 찾게 된 데는 이미 그가 아름다운 하나의 ‘오르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매사 남 탓의 불평불만으로 한껏 구겨진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고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소리도 심성이 뒤틀린 이에겐 한낱 소음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음악에 눈 떤 그는 오르간과 피아노에까지 손길을 뻗쳤다. 음악의 소리들을 모아서 간직하는 오래된 축음기와 최고의 명품 자동연주피아노까지 소유했다. 그는 사람보다 아름다운 세상의 소리들을 이끌고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아 경주의 관문에 부려놓았다. 그가 어린 날부터 쟁여 온 소리에 연륜의 스크래치가 긋듯 박물관의 진기한 악기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오르골소리박물관’을 치면 우리가 평소 못 본 세계최초의 귀중한 악기들이 즐비하다.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까지 보고나면 경탄이 절로 나온다. 보고 스치는 박물관에서 ‘듣고 느끼는’ 독특한 선물이다.

음악 감상시간과 단체관람예약시스템도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선물 받고 싶었던 여자들의 로망, 세계 각국의 ‘오르골’ 판매도 한다.

아름다운 소리선물은 오감의 충만을 줄 것이다. ‘오르골’의 역사만큼 유행을 거슬러 소중히 일생 간직하게 될 것이다.

일찍이 그의 혈관을 채운 자연의 소리와 그의 근육을 이루는 음악소리는 오래된 미루나무처럼 드높다. 드디어 그는 스스로 소리박물관이 되어버렸다. 경주에는 이렇게 잊지 못할 한 남자의 열정이 소리 내어 추억을 부른다. 낭만은 만들어가는 것.

이미진  lmijin0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