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바람은 우주에서부터 불어온다. 속 깊은 할 말처럼 바람이 심한 날, 그를 만났다. 그는 경주의 서쪽에서 굴러오고, 나는 동쪽에서 달려갔다. 돌처럼 단단한 눈빛의 젊은 남자 앞에서 늙은 나는 흔들릴 줄도 몰랐다. 경주예술회관의 <민태연조각가 다섯 번째 개인전>.

 

 

아, 라는 탄성조차 소리가 되지 못하는 돌 앞에서 나의 발은 무거워졌다. 조각들은 너무 높이 매달린 우월감도 없고, 그 어떤 치장도 없이 속살인데도 천박하지 않다. 내가 선 시공간을 넘어 아득한 원시의 어느 부족이 되고 싶었다. 돌을 다듬는 소리가 초원을 지나 숲을 흔드는 어느 한 때처럼. 모든 장치는 다 사치인 돌만의 돌.

저 입 무거운 돌의 뜨거운 침실 ‘민’아트팩토리가 물속에 잠겨 묵언 중이다. 이 남자 대단한 정력이다. 차가운 돌과의 긴긴 열애, 뜨거운 백서. 약골의 사내들은 저만치 나가떨어질 초인적 힘. ‘민’ 여운이 긴 이 음절이 낮고 깊은 울림을 남긴다.

민태연(44세) 돌조각가. 그를 만나기 전 먼저 도착한 나는 그의 숨결이 바람이 된 돌들에서 숨 냄새를 맡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숨의 행위는 바람이다. 바람조차 거부하는 돌은 죽은 듯 존재한다. 절대로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완고한 정체성이다. 돌조각은 사람의 땀을 먹고 제 고집을 꺾는 환생이다. 작가는 세상 가장 긴 산통으로 돌을 낳고, 돌은 마침내 고른 숨결로 산다. 그의 전시회 제목은 '바람 불던 날'이다. 돌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한 사내의 숨소리가 바람소리를 낸다.

 

열예닐곱 살의 사내아이 하나가 완강한 돌 앞에서 청춘의 정점을 박았다. 부산예술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이후 지금까지 중년의 사내가 되기까지 돌은 그의 들숨이며 날숨이다. 돌을 다루는 일은 흙이나 쇠를 다루는 일과 비교할 수 없는 엄격한 노동의 법칙이다. 그리고 돌은 그림의 덧칠처럼, 조각도의 향방처럼 수정되지 않는다. 돌은 용서를 모른다. 단 한 번 내려치는 정(丁)이 곧 전부다. 모든 과정은 하나의 완성에서 마지막 완성으로 귀결된다.

그의 누나는 화가이며, 그의 형은 사진작가다. 태생적으로 시각적 발달이 자연스러운 유전자다. 그가 어린 나이에 14개의 미술 분야 중 돌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애초부터 잔머리를 굴릴 엄두가 없어야 세상 가장 견고한 돌과 산다. 모든 돌은 별의 탄생과 더불어 형성된 원석이다. 돌은 여러해살이풀처럼 해마다 새로 돋지 않는다. 돌은 종이나 쇠처럼 공장에서 제작되지 않는다.

대전 엑스포 옆 어느 부대에 입대한 그는 대박을 쳤다. 부대 뒷마당에 널린 투박한 돌들이 그의 손을 거치자 멋진 기능성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그간 철판이나 목판에 페인트로 쓰였던 모든 글들이 천년이 가도 범상할 화석으로 남았다. 전국의 군부대에 소문이 났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다니며 각 부대의 돌을 주물렀다. 신병 때 받은 전투화와 전투복 한 벌이 제대 때도 멀쩡했다. 그의 예술은 군복무 3년 동안 확실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심지어 200톤 크레인을 동원한 큰 돌 앞에서도 그는 기가 죽지 않았다. 젊디젊은 열혈을 돌에 찧으며 ‘돌박사’라는 단단한 별칭을 얻었다. 제대 후에도 군대에서는 그를 찾았다.

이후 그는 전통과 현대, 종교에 관한 모든 돌조각을 섭렵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선택은 자유연애다. 순수예술작품은 좀체 밥이 되지 않지만, 예술행위는 밥을 먹어야 가능하다. 그는 예술의 끼니를 위해 양분된 시간을 쓴다. 한 달의 보름은 돈을 위한 작업이며, 나머지 절반은 예술을 위한 성찬의 시간이다.

부산태생인 그는 오래전부터 경주에 산다. 고도의 대지를 향해 고개 숙인 기와지붕들이 좋았다. 볕 바른 봄날 기와집 처마 아래서 해바라기를 하듯 경주에 몸을 부렸다. 그는 지난 해 부산벡스코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작품 전량을 판매하는 수확을 보았다. 올해도 12월 3일부터 7일까지 부산벡스코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서울토포하우스와 안산아트페어에서도 전시회를 연 적이 있지만 돌을 옮기는 작업은 굉장히 힘들면서 섬세한 어려운 작업이다. 그림이나 사진, 설치미술과 다르다. 첫째는 대형크레인을 동원하는 공간이라야 가능하며, 둘째는 천정의 높이가 문제시 된다. 갤러리들이 가장 꺼리는 종목이 돌조각 전시회다. 그리고 점차 돌조각가들이 줄어든다. 극한의 힘든 예술은 도태되고 있다.

그의 돌나무 액자는 다듬어 가공했을 뿐 다른 물질을 결합하지 않았다. 그 무엇과의 결탁이나 야합이 없는 그의 정신세계는 한겨레와 닮아있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협잡을 보아왔다. 나의 취재에 그는 또 다른 타산을 걱정했다. 여느 언론이나 잡지처럼 예술가를 띄워주는 물질적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했다.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뿐 바람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돌나무들 사이에 드나드는 바람도 정처가 없다. 그는 흔해서 귀하지 않은 돌에게 제대로 한 번 살아보자고 속삭인다. 세상은 늘 오늘이듯, 모든 이야기는 매순간 탄생하듯, 30여 년 품은 사랑이다. 그는 아직도 돌에게 할 말이 많다.

그의 작품에서 강직한 사내 특유의 푸른 바람이 분다. 그리고 바람은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전시회 이름이 '바람 불던 날'이라는 과거형인 까닭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바람이 그에게서 돌에게로 건너가며, 흐를 것이다.

우주의 순리다. 바람의 진리다.

편집: 이동구 에디터

이미진 편집위원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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