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있습니다. 친환경농사공동체로 오전에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어른들과 함께 농사를 짓습니다. 흙집으로 지은 집이 기숙사이고, 아이들이 해온 나무로 불을 때서 난방을 하고, 물을 덥혀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OT때부터 신입생과 재학생이 어울려서 장작을 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식 화장실이기보다는 뒷간이 더 잘 어울리는 재래식화장실에서 볼일을 봅니다. 똥을 싼 다음에는 재나 왕겨를 덮어야 하고, 신문지를 비벼서 뒤처리를 해야 합니다. 친환경비누나 샴푸가 아닌 것은 사용금지입니다. 학교에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없고, 휴대폰도 반입금지입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40여 분 거리의 지서리까지 걸어 나가야 합니다.

변산공동체 아이들의 얼굴은 부스스하고, 옷은 늘 후줄근해 보입니다. 무더울 땐 편안한 반바지, 쌀쌀한 바람이 불면 트레이닝복차림이 일반학교아이들의 교복처럼 일상화 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보면 건강하고, 활달하며 아이들다운 생기가 넘쳐 보입니다.  

2012년 10월 14일, 학교 축제가 있으니까 학부형들도 놀러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건강상태가 다시 나빠져서 포기할까 생각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13일 오전, 고등부인 혜준, 동욱이 어머니랑 함께 광주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광주공항에 내려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거기서 다시 부안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오전에 집을 나섰는데 부안터미널에 도착한 게 오후 4시. 거기서 늦은 점심을 먹고, 축제에 쓰일 밑반찬을 마련해서 공동체에 도착한 게 오후 7시. 공동체구성원들의 저녁식사시간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회포를 풀었습니다. 

두두둥! 드디어 축제의 날이 밝았습니다. 오전 10시. 아이들의 사회로 가야금, 피아노연주 등의 장기자랑으로 문을 연 축제는 어른들의 연극과 아이들의 연극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된 아이들의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 아이들이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아이들이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문배우를 뺨치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긴 대사를 어떻게 외웠을까? 저 실감나는 표정과 몸짓은 또 어떻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무척이나 감동 깊게 본 영화인만큼 텔레비전으로도 여러 번 감상했지만 연극은 또 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아이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서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칠 때는 어쩔 수 없이 또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내몬 닉의 아버지가 우리나라의 학부모들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입니다. 

아, 어른과 아이들의 연극 사이에 본 뮤직비디오 ‘변산스타일’은 포복절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다했을까?’싶을 정도로 기발했고,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뮤직비디오를 유튜브에 올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강남스타일의 원조인 싸이도 울고 갈 거라는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끝으로 오전공연을 마쳤습니다. 잠깐 점심을 먹고 오후 1시부터는 풍물패의 길놀이로 공연을 열었습니다. 흥겨운 가락이 흐르고, 아이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연을 했습니다. 흥이 났는지 변산공동체학교의 설립자이자 보리출판사대표인 윤구병선생님도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 다음엔 태껸반의 태껸시범과 겨루기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 태껸은 몹시 놀라웠습니다. 시범을 보일 때만해도 춤을 추는 것 같았는데 겨루기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지요. 발차기를 비롯한 다양한 공격은 제대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고, 공격을 받은 상대를 보고서야 겨우 짐작할 뿐일 정도로 찰나였습니다.  

오후공연부터는 학생회비를 마련하기 위한 주막이 열렸습니다. 공동체의 쌀로 직접 담근 막걸리와 김치전, 두부김치를 먹으면서 학생의 나이와 사는 지역이 다 다른 학부모들이 인사를 하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자기반 아이들이 빚고, 구운 도자기판매도 있었고, 약초반 아이들이 정성스럽게 채취해서 말린 약초판매도 있었습니다.

지난 3월의 입학식 때 전수한 핸드드립 커피 판매도 있었습니다. 한 번 밖에 가르쳐주지 못해 늘 미안함이 있었는데 김바리스타(성호)가 볶은 커피콩과 드립솜씨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4월에 비무장지대를 도보여행하며 채원이가 촬영한 사진들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초등부학생들도 장터를 열었습니다. 자신들이 쓴 글에 그림을 그리고, 제본한 그림책을 판매했지요. 그 판매방식이 입찰이었습니다. 여럿이 모여서 한 번에 입찰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림책 앞에 이름과 입찰가격을 적는 방식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 재미있기도 하고, 또 땡볕에 서서 ‘팔릴까? 안 팔리면 어떡하지?’ 염려하는 모습이 예뻐서 힘을 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위 칸에 5,000원을 적었지요. 그 순간에 아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고, 저희들끼리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패착이었습니다. 5,000원을 적어내고 10,000원쯤에서 낙찰을 받으려고 했는데 책을 한 권도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태껸겨루기가 끝나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올 때 밴드부의 공연히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앰프 하나의 상태가 나빠서 치직거리면서 잡음이 심했습니다. 넉살 좋은 녀석들이 “우리 불쌍하지요? 10만 원씩만 모아서 앰프를 바꿔주세요.”하는데 미안하고, 돈을 좀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조건 속에서 밴드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나친 연습으로 보컬의 목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공연장의 앙코르 요청을 계속 받아들였습니다. 공연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져 갔고, 급기야는 보컬과 기타리스트가 윗옷을 벗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나는 긴팔 옷을 두 개나 껴입고도 추워서 덜덜 떨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서는 강강술래입니다. 오전에 준비해둔 달집을 태우면서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시작했습니다. 고사리와 청어노래를 부르면서 이어진 강강술래는 오후 7시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이런 활기와 즐거움을 느낀 게 얼마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과천에 살면서 ‘세계마당극축제’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아내가 동의해준다면 공동체로 들어와 함께 농사지으면서 아이들과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과 마흔 명의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흥겹고, 재미있는 축제를 이끌었습니다. 그 열정과 재능을 보면서 ‘도대체 쟤네들이 못하는 건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굳이 그 답을 찾자면 영어와 수학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규과목이 아니고, 또 적당한 동기부여만 되면 금방 할 수 있는 아이들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도 고민은 있을 겁니다. 특히 졸업이 다가오는 고등부 아이들은 여러모로 진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있겠지요. 하지만 아이들과는 달리 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건강한 에너지, 그리고 도인의 경지에 오른 김희정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동생들과 함께 이런 멋진 무대를 마련해준 수연이, 성호, 기영이한테 수고 많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얘들아, 덕분에 즐거웠고, 좋은 기운, 많이 받아왔다. 그리고 내년에는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갈 궁리를 할 테니까 지금처럼 열심히 재미있게 잘 지내렴. 잘 놀 줄 아는 게 진정한 경쟁력이란다. 지도자의 미덕이기도 하고.

오성근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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