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인터뷰] 김오윤 주주-이미진 주주통신원

비온 뒤의 가을은 상큼하다. 술래가 되어 주주를 찾으러 나서며 살짝 들떴다. ‘우리 주주’라는 말이 김 오르는 찐빵처럼 따끈하게 가슴을 데웠다. 따뜻한 찐빵을 반으로 툭 잘라 나누어 먹듯 그런 자리를 기대했다. 옷차림에도 신경 쓰느라 흰색 레이스 장식의 베이지색 원피스로 은은한 부드러움을 살렸다.

모든 처음은 늘 설렌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지난여름 어느 날이었다. 나는 초저녁 술이 얼큰한 상태였고, 지인의 소개로 ‘한겨레주주’의 반가움을 아주 잠깐 나눈 게 전부다. 근데 첫 대면부터가 삐끗했다. 지인을 통해 미리 방문을 약속했는데, 극구 손사래부터 날렸다. 그렇다고 첫 술래잡기에 실패할 수는 없는 일, 들이댔다.

―그냥 별 것 아닌 주주에 불과해요. 오래 전이라 잊고 살았어요. 소액주주라 나서고 싶지 않아요.

나는 실로 단 한 주를 가진 주주를 첫 소개에 올리고 싶었다. 한 주를 가진 사람의 가슴도 붉지 않느냐. 백만 원에 십 원이 비면 백만 원이 아니다. 단 돈 십 원의 가치는 크다. 소액은 작은 정성이 아니라 작아서 더 넓은 참여다.

―실은 주주는 내가 아니고, 내 딸이에요. 붙잡혀 갈까봐…나라도 무섭고, 남편도 무섭고.

김오윤(여, 60년생). 고향은 서울 마포. 거주지 경주. 취미는 암벽타기. 고려대 생물학과 졸업. 현재 협동조합 『강물처럼』운영위원. 특기는 잔설의 봄 산을 헤매며 산나물 채취.

―동아일보 백지를 보았어요. 쪽지광고에도 참여했던 것 같아요. 늘 억압당하던 공포의 정국을 겪어서인지 당시의 기억조차 혼란스러워요. 해직기자들이 만드는 신문, 많이 반가웠어요. 가난한 신혼이었어요. 남편과 상의 없이 밥상을 샀다가 막 혼이 난 적이 있었어요. 남편이 무서웠어요. 그런데도 반찬값 따위를 거짓말하며 조금씩 떼어 모았어요. 걸핏하면 끌고 가 고문하는 나라가 무서워서 세 살짜리 딸아이 이름으로…. 그 작은 생명 뒤에 숨었던 내 자신이 너무 비겁하고 부끄러워서, 그래서…….

아아, 내 입에서 떨리는 탄식이 나왔다. 그녀도 나도 눈언저리에 눈물이 맺혔다. 독재의 퍼런 서슬이 기억났고, 한겨레의 출범에 꿈을 실었던 소망이 살아났고, 아직도 우리는 온전한 민주주의를 보지 못해서 동시에 콧물을 훌쩍였다. 엄마의 비밀을 감춰주었던 만 두 살짜리는 스물여덟 살이 되어 현재 ㅎ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고, 자신이 주주라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딸이 살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이후 ‘우리밀 살리기’에도 동참했어요. 바른 세상 바른 먹거리는 나의 신념이며 자연회귀의 철학이 나의 근본입니다. 올해는 토종고추씨 ‘대화고추’를 심었는데 볼품도 없고 수확이 적지만 만족해요. 종자를 지키는 일은 국가주권인데, 미국에게 팔아버린 이런 어처구니에 정말 화가 나요.

그럼요. 그래야지요. 맞아요. 나도요.

찰떡처럼 차진 그녀의 얘기에 나는 콩고물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탈핵을 열렬히 염원하는 그녀는 아주 전문적인 용어를 풀이해주며 무감각한 국민들을 애석해했다. 냄새도 없고 형체도 없는 핵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려야하는 사명감에 그녀의 말씨는 더욱 또렷했다. 자연친화적 에너지 실천으로 지난겨울 전기요금은 몇 천원을 냈다. 나무를 떼서 난방과 온수를 쓰는 로켓스토브(메스히터)를 사용했다. 사회전반의 모든 부당함에 대해 우리는 한참 분노했다.

감나무가지 아래의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아기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감나무의 속은 옹골차다. 어릴 적 우리 집 감나무 장롱은 데칼코마니처럼 같은 문양의 문이었다. 우리 주주들도 이렇게 서로 닮은꼴이다.

이미진  lmijin0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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