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11시 전국 한겨레주주통신원 워크숍 마지막 일정으로 27명의 주주통신원은 전주한옥마을을 찾았다. 글로벌 문화중심도시라는 전주가 가장 자랑하는 곳이다.

▲ 전주한옥마을 입구

워낙 일정이 빠득하여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았지만 김혜원 해설사님이 진수만을 골라 안내해 주셨다. 오목대 아래에서 시작하여 경기전과 어진박물관을 둘러보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 오목대 아래 전망대

요즘 방영중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육룡이 다르게 나오는데 실제 용비어천가에서 말하는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에서 육룡은 용비어천가를 지으신 세종의 선조 여섯 분을 말한다. 즉 이안사(목조穆祖), 이행리(익조翼祖), 이춘(도조度祖), 이자춘(환조桓祖)의 네 선조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 육룡중 이안사까지 전주에 살았는데 이안사가 사랑하는 전주관기 때문에 이 지역 산성별감과 다투게 되어 삼척을 거쳐 함주까지 쫓겨 가서는 결국 원나라의 실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 오목대 아래서 바라 본 전주한옥마을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하면서 선조의 고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 올라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성계도 오목대 아래에서 바라보는 전주한옥마을을 알아봤던가?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현재 약 9만여 평에 한옥 600여 채, 비한옥 100여 채가 있고, 700여세대 천여 명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란다.

▲ 오목대 아래서 바라 본 마을, 저멀리 아주 작게 전동성당이 보인다.

을사늑약(1905년)이후 일본인들은 서문 밖에 천민이나 상인들과 같이 살았는데 1907년 양곡수탈을 위해 전군가도를 개설하면서 전주성 서반부를 철거하고, 1911년 말 성곽 동반부마저 철거하게 된다. 이로서 일본인들이 성내로 들어와 일본식 주택을 짓고 살게 되는데 1930년쯤부터 이에 대한 반발과 민족적 자긍심으로 전주 유지들이 한옥들을 짓기 시작한 게 오늘날 전주한옥마을을 있게 하였단다.

▲ 전주한옥마을 국제슬로시티 지정 안내문

2011년에는 전주한옥마을이 국제슬로시티로 공식 지정되었다고 한다. 천천히 걸으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좋단다.

▲ 경기전 가는 길

경기전을 향해 가는데 거리에 맛난 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그 중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풍년제과 앞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초코파이로 유명한데 1인당 5개밖에 안 판단다.

▲ 경기전 정문

전주비빔밥을 보면 동쪽에 시금치 푸른색, 서쪽에 도라지 하얀색, 북쪽에 북현무 검은색 고사리, 남쪽에 붉은색 당근 가운데에 계란 노란자를 올리는데 이게 오방색 오행을 나타내고, 이를 방짜 유기그릇에 넣어 태극을 의미하여 음양오행을 비빔밥 하나에서도 생각하게 만든 거란다.

▲ 경기전

경기전 앞에 불의 기운을 막는 드므도 여러 개 놓고, 물에 사는 동물 거북이도 2마리 붙여 화기를 막았단다. 드므에 들어있는 물은 실제 불을 끄는데 사용하는 물이 아니고 불귀신이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했다 한다.

▲ 경기전 담 옆 대나무

경기전에서는 광해를 비롯해 많은 영화도 찍었다고 한다.

담 가까이에 대나무를 심은 이유는 담을 넘어 침입할 경우 부스럭 소리가 나고 불이 나도 튀는 듯 한 소리가 나도록 하기 위해서라며 조선시대 세콤은 대나무였단다.

▲ 전주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사고(서울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중 하나가 전주사고이다.

임진왜란 때 충주사고와 성주사고는 왜구가 태워버렸고, 경복궁 춘추관은 선조가 도망가자 성난 백성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하게 전주사고만 남았는데 사고 참봉 오희길과 전주 유생 손홍록과 안의등이 내장산으로 옮겨 1년 동안 지키다가 또 묘향산에서 7년동안 지켜내었단다. 이 덕분에 원본사고가 남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등록된 것이다.

전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허성도님의 강의 요약본이 SNS에서 유행인데 그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첫째가 기록의 문화이다. 스핑크스, 만리장성과 같은 유적도 없고 베르사유 궁전 같은 호화찬란한 궁전은 없지만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다. 항상 그 사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다.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하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다.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서 찾아보라.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한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고 싶으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 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그게 뭐냐면 감히 "국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이다.”

허성도 교수의 말은 과장도 아니고 포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전주사고 보존의 그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 전주사고 옆 은행나무

경기전에는 은행나무가 많다.

▲ 겸재 정선의 행단고슬

공자님이 은행나무 아래서 단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단을 행단이라고 했다. 겸재정선이 그린 행단고슬(杏壇鼓瑟)에는 은행나무아래서 제자들과 공자가 거문고 소리를 즐기고 있다. 이렇듯 유학자들이 은행나무를 좋아하여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님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단다. 한자 행(杏)이 살구나무, 은행나무 모두를 뜻하여 헷갈린 모양인데 어쨌든지 공자님의 뜻만은 전해지면 될 것이다.

▲ 어진박물관

태조어진은 비단에 그려졌는데 극사실주의 묘사되었고, 태조의 눈썹 위 사마귀가 보이면 시력이 2.0을 넘는단다. 하여 어진을 그릴 때 수염은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이란 쥐수염붓으로 그렸다고 한다. 우리 초상화는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배채법(北彩法)이라고 비단 뒷면에서 은은하게 색칠을 했단다. 어진은 5개만 남아있는데,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어진만 전한단다. 그 중 태조가 정말 잘 생겼다고 한다. 눈에서는 빛이 나와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으며 키도 6척으로 180센티가 넘었다 한다.

▲ 태조어진

어진을 그릴 때 얼굴은 주관화사(主管畵師)가 그리고, 몸은 동참화사(同參畵師)가, 나머지 색칠은 수종화원(隨從畵員)이 하였는데 그 유명한 김홍도도 주관화사는 한 번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듯 얼굴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얼굴에는 그 분의 혼이 그려져야 하고 성정이 나타나야한단다. 인의예지는 나타나야하지만 칠정 감정은 보여서는 안 된단다.

▲ 태조어진 진본전시 포스터

어진 진본은 어진박물관 개관일을 전후하여 매년 20일정도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우리는 운 좋게도 진본을 볼 수 있었다.

어진박물관을 관람한 후 잠시 기다리며 윤명선 주주통신원이 왕명에 붙는 조와 종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해설사님은 조는 국란을 극복하고 공이 많은 왕에게 붙이고, 종은 덕업이 있는 왕에게 붙이는 것으로 왕의 사후, 왕실에서 결정하는 것이라 하였다. 고로 왕실 맘대로가 아닐까 한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박효삼 주주통신원  psalm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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