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료에 관해
2. 박정희 암살과 미국의 역할
3. 전두환 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4. 광주 학살과 미국의 역할
5.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

2. 박정희 암살과 미국의 역할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됐다. 19615.16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 18년간 철권통치를 펼쳐온 독재자가 심복에게 총 맞고 죽은 것이다.

27-28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국무부에 하루 몇 번씩 전문을 보냈다.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잘 계획된 군사쿠데타인지, 일부 기득권 세력이 두려워하던 지도자를 제거해버린 사건인지, 또는 단순히 기상천외한 사건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한국 체제가 큰 혼란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새로운 정권이 현저한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징벌적 조치에 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해야 한다..... 1960년대부터 한국에 대해 미국이 행사해온 압력 때문에 우리가 너무 강경하거나 너무 어리석게 한국의 체제개편을 압박해 나가면 극도로 부정적인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군사쿠데타로 박 대통령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 주변의 일부 인물들, 아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끄는 세력이 정부구조를 유지한 채 괜찮은 후계자를 내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대통령을 제거했을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의 강경책이 한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한명이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글라이스틴은 박정희의 후임이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정치인, 군인, 재야인사, 목사, 교수, 언론인, 학생 등 거의 모든 분야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며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김종필, 정일권, 김영삼, 김대중 등에 대한 인물평을 국무부에 보고하기도 하면서 111일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우리는 영향력을 조용히 활용하여 지금이 보다 민주적인 헌법으로 나아갈 때라는 판단을 엘리트 지도층 내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켜야 한다. 국무부 인권국은 우리가 영향력을 조용히가 아니라 완전히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분노를 살 수 있는 지도가르침을 준다는 인상을 피해야 한다. 특정세력에게 반대하거나 편들면 안 되고, 상당수 한국인들이 생각하듯, 배후에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11월 초 미국하원에서 박정희 암살에 관한 청문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글라이스틴은 이를 막아야 한다며 118일 국무부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나는 청문회가 미국이 박정희 죽음을 공모했다는 의혹을 건드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공모한 적이 없으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을 때도 그의 정부와 안보, 경제 등의 문제에 대한 협력을 지속하겠다는 신호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청문회에서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박 대통령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더 증폭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공개적 이슈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대통령을 죽인 중앙정보부장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소문이 국내외에서 확산되자, 주한미국대사는 1119일 다음과 같은 내용 전문을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미국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한국에서 퍼지고 있다. 반체제인사들과 기독교단체들은 미국이 김재규 음모의 일부였으며 최소한 신호를 보냈으리라 믿고 있다. 학생들도 이러한 시각을 공유한다는 보고가 있었고, 박 대통령의 일부 측근도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암살에 관여했지 않았을까 우려하고 있다. 공산주의 날조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의혹 외에도 일본은 물론 미국언론마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것은 쿠데타 기도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였다는 취지로 얘기하면서 음모론을 부채질하고 있다. 김재규가 나의 격려를 받고 박정희를 공격했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이 1년 이상 가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개인 또는 단체에 하고 다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나는 그러한 국가전복 행위에 관련된 적이 없지만, 박 대통령의 몇몇 조치에 대한 공개적 비판으로 일부 한국인들이 우리의 언행을 오해해 박정희 통치가 종반으로 치닫고 있으며 미국은 그가 사라지더라도 아무런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했을 수 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임기 전망과 같이 민감한 주제를 제기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내가 그런 언급과 가장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 926일 우리의 마지막 대화 도중 김재규가 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다. 김재규가 나에게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과 향후 국내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나는 경제 분석과 관련하여 향후 6-12개월 간 한국경제의 발전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620일 글라이스틴은 김재규를 만나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관심을 거듭 전했다. 청와대에서 열릴 한미 정상회담 10일 전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문제를 1976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1977년 취임하자마자 한국의 인권문제를 비판해 박정희 정부와 극심한 갈등을 불러오고 있던 터였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인들이 한국의 인권문제를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상당히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히 알아들었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629일 카터가 몹시 굳은 표정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인권 대통령으로서 한국의 가장 저명한 인권 희생자인 김대중과 오래 전부터 면담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된 터였다. 카터가 김대중을 만나면 정상회담 분위기가 냉각되고, 한국방문 성과가 사라지며, 박정희가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인권문제에 관한 미국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다는 글라이스틴의 만류 때문이었다. “한국대통령과의 일정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김대중을 만나야겠다는 미국 대통령의 고집을 주한미국대사의 강력한 반대가 꺾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630일 정상회담이 역사상 가장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가운데 신랄하고 험악한 말이 오갔다. 카터는 인권이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재소자들을 될수록 많이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75일 박정희는 카터의 요구에 따라 180명 정치범을 연말까지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89-11YH무역회사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1명이 건물에서 떨어져죽는 ‘YH사건이 일어났다. 글라이스틴은 경찰력을 동원한 박정희의 강압조치에 외무부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9월엔 중앙정보부장에게 정치억압을 완화하라고 촉구했다. 9월 중순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도록 공화당에 지시했고, 여당은 104일 야당총재를 제명했다. 미국 국무부장관은 한국 외무부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박정희의 조치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주한미국대사를 소환했다. 1016일부터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인 부마항쟁이 전개되었다. 18일 박정희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에 글라이스틴은 서울을 방문한 미국 국방부장관과 박정희를 방문해 정치억압에 대해 경고했다. 20일엔 박정희가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했다. 그리고 26일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었다.

이와 같이 인권을 앞세운 카터 정부의 골칫거리였던 한국 대통령을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암살하는데 미국의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1988년 한국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위원회의 질문에 19896월 미국이 공식 발표한 ‘19805월 대한민국 광주사건들에 대한 미국정부 성명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미국의 견해와 행동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부터 19805월 광주사건 이후까지 사건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성명은 박 대통령 암살부터 시작한다..... 미국은 197910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았으며 북한이 이를 남한을 공격할 기회로 이용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여기서 미국을 몇 개로 나누어볼 필요가 있다. 행정부와 의회가 다른 의견을 표출하고, 행정부 안에서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다른 주장을 펼치며, CIA는 은밀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 국무부 소속으로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주한미국대사는 인권문제와 관련해 한국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경고하기도 하며 한국 중앙정보부장을 수시로 만나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외국 지도자가 미국정책에 아무리 역행해도 미국정부 대표가 암살을 공모하거나 부추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CIA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수없이 그렇게 해왔다. CIA1960-70년대 해외에서 외국지도자들을 직접 암살하거나 테러분자를 고용해 암살하기도 했다. 쿠데타를 지원하기도 하고 시위를 부추기기도 했다. 공식 외교문서로 밝힐 수 없을 뿐이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은 1945-48년 미군정 기간에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어 미군과 달러와 경찰로 한국을 통치했다. 독재정치와 휴전반대 때문에 1952-53년 사이 적어도 두 번 미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거될 뻔했다. 19604월 학생시위 격화에 따른 주한미국대사의 거센 하야 압박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둘째, 19604월혁명으로 들어선 장면 총리는 미국의 충고와 간섭을 잘 받아들이며 미국의 모든 정책에 우호적이었다. 주한미국대사는 그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반미감정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그에게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며 미국이 장면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국무부는 장면 집권 3개월 만에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1년 박정희의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제1사단장과 제2군사령관 등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연락해 한국정부에 충성하겠다며 병력동원을 원했지만, 그와 주한미국대사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은 3년 후 자신의 재임 중 가장 성공적인 해외 비밀공작으로 5.16 쿠데타를 꼽았다.

김재규 한국 중앙정보부장의 상대는 주한미국대사보다 미국 CIA 한국지부장이었다. 주한미국대사는 김재규를 통해 한국 권력층을 접촉했다고 밝혔고, CIA 한국지부장은 김재규와 종종 골프를 즐기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2020년 김재규 장군 평전을 쓴 김삼웅에 따르면, 김재규는 10.26에 앞서 두 번이나 박정희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박정희 암살을 준비하는 과정에 미국이 무슨 역할을 했겠는가.

* 이 글은 20201110일 김대중도서관에서 김대중 평화센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광주전남추모사업회,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사업회가 공동주최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 40주년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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