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한겨레> 주주, 독자는 ‘시인 안도현’을 만나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군산까지 한 달음에 모였다. 오후 8시,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군산청소년수련관에 모인 <한겨레>식구들은 ‘안도현 시인의 가을 시의 밤’ 행사에 빠져 들었다.

[관련기사 보기]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63

토크콘서트의 첫 주제는 안 시인의 ‘절필선언’이었다. 한 종합편성채널에서 방송한 ‘자극적인 내용’이 화면에 뿌려졌다. 동영상이 나오는 중간 중간 관객석에서는 탄식이 흘렀다. 말 그대로 ‘자극적인 내용’으로 과장된 말투와 행동으로 가득 했던 영상이 끝나고 사회를 맡은 안지애 주주통신원이 안도현 시인을 소개했다.

1961년 경북예천에서 태어나 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낙동강’, 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등단했다. 85년부터는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했지만 4년 뒤 89년 8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됐다는 이유로 해직됐다. 94년 2월까지 전교조 이리익산지회에서 일을 하다 3월 장수 산서고등학교로 복직했다. 97년 2월 교직을 떠나 전업생활을 시작해 <모닥불>, <외롭고 높고 쓸쓸한>, <안도현의 발견>, <어른을 위한 동화> 등 시집과 산문집 등을 발표했다. 현재 안도현 시인은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겨레> 주주이자 독자다.

안도현 시인은 “<한겨레>가 창간했을 때 1만원이 아쉬운 상황이라 창간에 참여하지 못했다. 미루다보니 최근에서야 ‘소액 주주’가 됐을 뿐이다”고 설명했다. ‘절필선언’에 대해서는 “절필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고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시를 쓰지 않고, 발표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 ‘절필선언’으로 보도됐다”며 웃으며 말했다.

11월에만 19곳의 행사가 잡혀 있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안 시인은 “아직 대학교 학기가 끝나지 않아 수업을 계속 하고 있고 오늘 10시에 학교 연구실로 고등학생 10명과 선생님이 함께 오셔서 인터뷰했다. 점심으로 컵라면을 먹고 논산 상당마당을 갔다가 전주 집에서 밥을 먹고 여기에 왔다”며 “이 콘서트가 끝나면 소주 한잔 하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고 설명했다.

지난 대선 문재인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안 시인은 ‘정치’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흔히 듣는 말이 ‘나중에 정치하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교사나 공무원들은 자기 의견을 말하고 싶어도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며 “저는 대학에 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것이라 생각해 정치적 견해를 가끔 이야기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안 시인은 2013년 검찰 조사를 받았다. 대선과정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장했거나 도난에 관련됐다는 트위터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간단한 참고인 조사로 시작했지만 결국 기소까지 당했다.

안 시인은 “처음 피진정인 신분으로 검찰에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자료만 보내도 된다고 했지만 그냥 검찰에 가기로 했다”며 “당시 상당히 좋은 분위기에서 담당검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는데 5월 담당검사가 바뀐 뒤 피의자 신분으로 바뀌었고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전원 무죄 평결을 내렸지만, 1심 법원은 후보비방을 유죄로 보고 선고유례를 내렸다.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아직 대법원은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안도현 시인은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광복이 됐지만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늘까지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친일 세력들이 권력을 가져 대한민국 초기 자본가들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이승만, 전두환, 노태우 등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대한민국 주류라고 말하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 얘기하는데 이명박 5년, 박근혜 5년을 저는 망쳐버린 10년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한다면 이렇게 기록하겠지요. 망쳐버린 10년이 아니라 ‘더욱 빛나는 10년’이라고.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해서는 안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절필을 선언한 안 시인은 지난 9월 지난 3년 간 트위터에 올린 글 가운데 244꼭지를 골라 <잡문>이라는 책을 내놨다.

안 시인은 “제가 휴대전화가 없는데, 컴퓨터로 트위터는 한다. 박근혜 정권에서 시를 쓰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에 지금 3년째 시를 쓰지 않는데,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니 시가 안 써 지더라”라며 “그렇지만 시와 비슷한 생각들은 계속 떠올라 그냥 떠오르는 중얼거림들을 트위터로 얘기했다”고 밝혔다. 이어 “SNS는 제가 보기에는 세상, 사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말하는 개인의 작은 언론이라고 본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랄지. 그때 그때 정부의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말들에 대해 ‘나도 좀 뭔가 말해야겠다’는 통로로 이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북 완주군 구이에 있는 작업실에 대한 소개도 이어졌다.

안도현 시인은 “그냥 낮잠 자기 좋은 곳이다. 시내 아파트에 사는데 ‘구이구산(작업실)’에 가면 고양이가 똥 누고 간 것을 치워야 하고 풀 난 것을 뽑아야 하는 등 할 일이 많다”고 설명했다.

객석에서 깜짝 패널로 나온 허익배 주주통신원은 ‘연탄’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된 배경을 물었다. 국어교사 시절 우연히 얻은 소재라고 설명했다.

[잠깐 영상 보기] http://youtu.be/C6dOu5wGoQI

안도현 시인은 “해마다 가을 주제로 시를 쓰는 백일장을 여는데 항상 ‘낙엽’, ‘코스모스’ 등 5년 동안 소재가 똑 같았다”며 “가을이 되면 연탄 트럭을 많이 보게 되는데 아무도 쓰지 않아 내가 쓴 것이다”고 말했다.

안도현 시인은 <사람>이라는 산문집에서 백석 시인을 ‘내 시의 사부다’고 표현했다. 또 지난해에는 <백석평전>을 출간하는 등 백석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안 시인은 “시인 백석은 당시 활동했던 다른 시인, 김소월, 박목월 등과 달리 친일을 비켜간 사람 가운데 하나로 1940년부터 해방 전까지 반도에 갇혀있지 않고 만주에서 지내며 북방인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국어교과서도 국정화가 된다면 백석 시인의 작품이 사라지고 다른 친일 시인들의 시가 실릴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날 토크콘서트에 참여한 관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순천에서 온 중학생 조민주 양은 “국문과를 나와 시인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시인을 한다고 하면 주변 많은 분들이 말린다”며 “시인, 작가로서 후배들에게 당부에 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안 시인은 “국문과를 나오면 굶는다는 소리를 많이 한다. 돈을 벌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며 “시인이 직업이 될 순 없겠지만 다행인 것은 좋아하는 것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 수 있다. 대학에서 전공한 것을 사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며 “시는 다른 예술과 달리 돈이 적게 든다. 음악을 하는 예술인은 악기 등을 사고 많은 돈을 들여 연습해야 하지만 시인은 시집 100권만 읽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가을 시 잘 쓰는 법’을 설명했다.

안도현 시인은 “은유법과 직유법을 시적 언어로 사용하면 참신하고 새로운 느낌을 준다”며 “시대에 맞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도 시인의 역할이다”고 밝혔다. 이어 “가을에 귀두라미는 ‘가을, 가을’하고 울고, 여름의 매미는 ‘여름, 여름’하고 운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곳, 군산을 개인적으로 좋아해 자주 오게 된다. 군산은 나에게 ‘오래된 책 표지 같다’”고 덧붙였다. 토크콘서트가 끝나고 안 시인의 시집을 들고나와 사인 받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편집: 이동구 에디터

최홍욱 편집위원  ico@chon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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