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동 인왕산 기슭 성곽탐방로를 따라가다

행촌동과 사직동을 구분하는 소방도로 사거리 편의점 (구 옥경이 식품) 앞에서 성곽 바깥쪽을 따라 인왕산을 향하여 탐방로를 걷는다. 성곽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을 택한 것은 바깥쪽에서 축성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인왕산을 넘어 숙정문까지 성곽은 완전하게 복원되었고, 성곽탐방로도 잘 정비되었다.

성곽을 따라 포장도로를 100m쯤 올라가다가 주택지 옆으로 난 좁은 성곽길로 진입하면 교남체육공원이 나온다. 이 구간의 성곽에서도 태조 때, 세종 때, 숙종 때의 축성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서쪽으로 무악동현대아파트가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로는 인왕산이 지척에서 손에 잡힐 듯이 올려다 보인다. 그 성곽산책로를 200m쯤 더 올라가면 무악동에서 인왕산 스카이웨이로 연결되는 찻길과 마주친다. 도성 성곽을 허물고 만든 도로인데, 성곽이 끊긴 자리에 초병이 상주하는 초소가 있다. 이를테면 인왕산 남쪽 등산로의 시작지점이다.

박완서의 어린 시절을 추적하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박완서의 자전소설 「목마른 계절」과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떠올린다. 내가 사는 곳이 이곳이어서 그 소설이 주는 감회는 남다르다. 그 소설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가 오빠와 그녀 남매를 데리고 상경하여 처음 세 들어 살던 집은 현저동 46-418번지였다. 광복 후 몇 차례의 행정동 개편 후 의주로 남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남고, 북동쪽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작가는 지금의 무악동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는 산중턱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 당시 현저동은 아주 가난한 동네였었나 보다. 그녀는 그 당시 현저동에서 현재의 소방도로를 넘어 사직동 매동 보통학교를 다니며 산록 길가에서 싱아라는 식물을 애타게 찾아다녔다고 했다. 싱아라는 초본식물은 표준어로 마디풀과의 수영이다. 꽃은 5~6월에 줄기 윗부분의 원추꽃차례에 녹색 또는 녹자색의 작은 꽃들이 촘촘히 모여 핀다. 둥근 줄기는 30~80㎝ 높이로 곧게 자라고 세로줄이 있으며 붉은빛이 도는데, 그것을 잘라먹으면 새콤한 맛이 난다. 나도 어릴 적, 배가 고플 때는 들에서 그것을 뜯어먹고 허기를 달랬다.

우선 「목마른 계절」을 보자. 진이네는 1‧4후퇴 때 피난행렬에 끼이지 못하고 외톨이가족이 되어 현저동 산동네에 주저앉게 되었다. 주인공 진이는 먹을거리를 구하러 밤마다 빈집색출에 나선다. 이를테면 도둑질이다.

『은밀한 즐거움을 앞두고 가벼운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댄다. 이런 즐거움을 한꺼번에 헤프게 낭비할 순 없다. 하루 한 집씩만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비밀을 음미하는 즐거움을 갖자. 산동네에 판잣집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아 보이지 않는가,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좀 방향을 바꿔서 너른 마당에서 바른쪽으로 꺾이는 한층 가파르고 빈촌인 곳으로 향한다. 비탈 위 첫째 집에서 잠시 머뭇거린다. 매일 밤 겪는 일이면서도 역시 잠깐의 주저와 두려움은 있었다. 문을 더듬어본다. 열쇠도 채워있지 않고, 못박혀있지도 않았다. 』(p236)

이번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묘사이다.

『나는 숨넘어가는 늙은이처럼 헐벗고 정기 없는 산을 혼자서 매일 넘는 메마른 고독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고, 서울아이들을 경멸할 구실을 찾았다. 사직공원에 벚꽃이 지고나면 이윽고 온 산에 비릿한 젖내를 풍기며 아카시 꽃이 피어났다. 아카시 꽃이 만개하자 사내아이들이 산에 떼를 지어 다니면서 사냥질하듯 모질게 탐스러운 가장귀를 꺾어서 꽃을 따먹었다.』(p76)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p77)

일제강점기에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하교)도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입학시험을 쳐야했고, 또 아무 학교나 제 마음대로 시험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구제(지금의 학군제)라는 것이 있어서 사는 동네에 따라 갈 수 있는 학교가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박완서의 엄마는 문안에 있는 좋은 학교를 보내려고 지금의 주민등록에 해당하는 기류계를 사직동에 사는 친척집에 옮겨놓았다. 현저동에서 가까운 매동 보통학교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사직공원 옆에 있었으므로 현저동에서 그 학교에 가려면 인왕산자락을 넘어야했다. 현저동 중턱에서 성터가 남아있는 곳까지 올라가면 사직공원으로 내려가는 평탄한 길이 나있었다. 그 길은 사람의 왕래가 한적한 길이어서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숲속에 문둥이들이 득시글댄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학교에 보낼 욕심으로 항간에 떠도는 문둥이들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일소에 부쳤다.

『매동학교로 넘어가는 방향 말고, 우리 동네가 뻗어 올라간 쪽으로 비탈을 더 올라가면 인가가 끝나고 바위산이 보인다. 사람들은 거기를 선바위라고 했고, 선바위에서 물 없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계속 오른쪽으로 굿당이 나오고, 건너쪽엔 사람들이 신령한 바위라고 믿는 형제바위가 보였다. 형제바위는 누가 보기에도 신령해보였다. 뒤에 있는 절벽과는 따로 두 사람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형상의 거대한 바위였다.

그 앞에는 뭔가를 비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고, 굿당에 큰굿이 들었을 때도 거기다 먼저 고수레를 했기 때문에 그 앞엔 떡 부스러기가 늘 널려있었다.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자지러진 풍악소리만 나면 엉덩춤을 추면서 굿당으로 치닫는 게 취미랄까, 심심한 나날에 돌파구가 되었다.』(p80)

『큰 굿이 들었을 때는 구경꾼에게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떡이나 알록달록한 색사탕 같은 걸 노느매기해줄 때도 있었다. 실은 그 기대가 없었다면 굿 구경이 그렇게 신바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참 입이 궁금할 나이였다. 삼시 밥을 주리진 않았지만, 군것질할만한 것이 전무한 긴긴 여름날 오후의 권태를 무엇에 비길까』(p83)

처음에 그곳에 이사 와서는 시골아이라고 동네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했고, 보통학교를 문안으로 다니면서부터는 동네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했다. 사직동 매동학교에서도 그 동네 급우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혹시나 주소를 옮겨 부정입학한 사실이 탄로 나면 어쩌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그녀는 외로운 보통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홀로 상상하기를 즐겼고, 그런 어린 시절은 훗날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소설을 쓰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글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이동구 에디터

편집 : 이동구 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