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도 그 날에 있었던 잊지 못할 죽음의 향연....

그러니까 2015년 겨울 12월 하고도 중순경, 우리를 초대한 사람은 당대의 유명 여류 시인 고미란이었고 그의 초대를 거절하거나 마다할 이유는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고시인으로 말하자면 재색을 겸비한 오십 대 중반의 여류시인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남아프리카 여행기는 동남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여행기를 읽고,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롯한 동남아인들의 관광객이 폭주하는 바람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아프리카당국으로부터 명예시민상을 수여받은 바 있으며 남아프리카 국립대학으로부터는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한평생 살면서 이런 여류시인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겁고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기꺼이 고미란 시인의 초대에 응했다. 단 한 사람 마석진 회장만은 예외로 하고 말이다.

마석진 회장은 칠십 대의 노익장으로 한국 마작협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한국 사회에 마작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고시인의 초청에 응하려 하지 않은 것은 나름 사정이 있었다. 한국마작협회의 창립 기념 리셉션 날짜가 하필이면 고미란 시인이 초대한 날짜와 겹친 것이다. 마회장으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중적인 인기라든지 사회적 유명도로 볼 때 마회장이 고시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터에 고시인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면 팬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저 이가 팔순도 안 되었는데 벌써 망령이 날리는 없고.." 라거나 "마작협회장이 감히 국민시인 고미란을 찬밥너머 쉰밥 취급하려 하다니?" 하면서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마회장으로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협회장으로서 협회의 창립기념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고미란의 초대에 냉큼 응했다가는 협회 회원들의 원성을 감수해야 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마회장이나 고시인 모두와 친분이 두터운 나로서는 넋 놓고 구경만 할 수 없어서 마회장에게 창립기념 행사를 대폭 축소하고, 행사시간을 오전에 약식으로 끝낼 것을 제안하였고, 마회장도 마지못해 그리하마! 하고 초대에 응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로 생과 사의 갈림길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로 엇갈리곤 하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고미란 시인의 초대에 응한 사람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참가자들은 거의 진보성향의 인사들이었고 마석진 회장과 필자 외에도 진보성향의 월간지 편집국장으로 있는 하상희 국장과 당시에는 아직 붐을 타지 않은 갤럭시 아이패드 화가인 박성길 화백, 한국출판물협회의 서군삼 부회장, 파리특파원을 지냈던 진보일간지 베테랑 기자인 유일근기자,  문학평론가이자 차세대의 떠오르는 여류시인 문지희 등이었다.

초대된 장소는 수락산 자락에 있는 고시인의 별장이었으며 우리는 모두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수락산 자락에서 만나 산행을 하고 별장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또한 고시인의 제안으로 휴대폰도 일체 지참하지 않았다.

별장에 초대된 1박2일 동안만이라도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우리만의 세계를 즐기자는 고시인의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템플스테이에서 일체의 휴대폰을 지참하지 않게 하는 것과 비슷한 취지로 쉽게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고시인의 제안은 이렇게 순수한 제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후에 죽음의 향연을 초래한 음모설의 근거로써 두고두고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수락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고시인의 별장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별천지 같았다. 사실 고시인이 한국문인협회장으로 선출되어 한 턱을 내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순수한 친목 모임이었기에 이 모임이 죽음의 향연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참석자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모종의 암시는 있었다. 이를테면 "죽을 때까지 실컷 마셔보자" 라든가 "내일은 아무 생각 없이 마시고 죽자"는 농담을 단체 카톡방에서 재미삼아 주고받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흥을 돋우고 맘껏 취해보자는 의미였지 그것이 어찌 죽음을 암시하는 농이 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문 닫아걸고 죽을 때까지 마시자", "밤새도록 죽음의 향연을 펼쳐보자"는 말을 재미삼아 주고받기까지 했으니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그 때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고시인은 그날 특별히 전라도 모처에서 공수해온 막걸리로 우리를 대접하였다. 그날 마신 탁주는 우리 모두 평생토록 기억에 남을 만큼 맛나고 향이 그윽했기에 맘껏 취하고, 세상사 모든 일을 잊을 만큼 흥에 겨웠었다. 초대한 자도, 초대받은 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죽음의 향연은 이렇게 치명적인 매혹으로 참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누군가 별장 베란다에 나가더니 초승달이 떴다며 감탄하였고, 우리 모두는 우르르 베란다로 몰려가서 초승달을 감상하였다. 12월의 겨울 초승달은 애잔하여 우리 모두의 가슴을 아련한 과거의 회상에 잠기게 하였다. 초승달을 애첩에 비유한 사람이 누구였던가. 참으로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저쪽 편에서 홀로 감상에 잠기던 고미란 시인이 시 한 수를 읊기 시작했다.

 

그대, 외로운 방랑자여,

출생이 다른 별들 사이에 끼어

하늘로 올라 지상을 응시하는 일에 지쳐,

한결같이 응시할 대상을 찾지 못한

기쁨 없는 눈처럼 항상 변하는 일에 지쳐,

그대, 그리도 창백한 것인가?

 

셸리의 '달에게'라는 시의 한 구절이었다. 시인으로 인해 더욱 창백해진 달을 보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소중한 대상을 찾지 못해 지쳐 창백해진 어느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였고, 현실 속에서 꿈과 이상을 찾아 방황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안에 떠는 존재로서의 우리 모습을 떠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달에 대해 이런저런 회상에 잠기던 차에 한국 문학계의 떠오르는 별인 문지희 시인이 고미란을 이어받아 시를 읊는다.

 

우리는 한밤의 달을 가리는 구름과도 같은 존재이니,

불안한 모습으로 달리고 번득이며 떨지만,

어둠에 환한 줄무늬를 그리며 질주하지만,

곧 밤이 에워쌀 것이고 구름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니.

 

이는 셸리의 '덧없음'이라는 시가 아닌가. 어쩌면 그날 우리가 느꼈던 감동과 전율도 어느덧 밤에 에워싸여 영원히 사라질 구름 같은 것이었음을 우리는 예감했는지 모른다. 훗날 언젠가 그날의 감동과 전율을 다시 살리고 싶어 한다면 그것 역시 부질없고 덧없는 일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우리는 한겨울 달밤에 탁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치 이태백이라도 되는 냥 달과 마주하며 탁주를 마셨다.

이렇게 시로 한껏 흥을 돋운 우리는 탁주가 동이 날 때까지 마셔댔다. 모인 사람 8명에 탁주는 두 상자 40병이었으니 평균 5병을 마신 셈이다. 모두 실내로 들어와 한국정치와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소회를 나누던 중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누군가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토하고 각혈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하나둘씩 배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그러했다.

그런 갑작스런 혼란의 와중에 고시인은 우리가 모르던 사실을 공표했는데 실로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탁주는 지방 대학 홍모 교수가 새로 개발한 풍미우수 막걸리 전용효모를 첨가한 막걸리었으며 그 교수가 고시인에게 탁주를 전하면서 일단 완벽한 검증이 끝나지 않았으니 한 병까지는 좋으나 두 병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것이다. 또 유리잔에 마시면 효모가 부작용을 일으켜 장에 치명적인 손상이 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신당부가 있었다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지 여부는 알 길이 없노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사기잔으로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그런데 누군가 이 막걸리는 색감이 Rice Wine 같다며 와인 잔에 마시면 더욱 운치가 있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와인 잔에 막걸리를 마셨던 것이다. 왜 고시인은 홍교수의 경고를 가볍게 받아들였건 것일까? 고시인은 이에 대해 함구였으나 워낙에 막걸리를 좋아하는 호방한 그녀인지라 그저 대수롭지 않게 들었거나 신임 문인 협회장으로 신문 방송 등 언론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증세는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각혈뿐만 아니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한 통증이 이어졌다. 말짱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더욱 기가 찰 일은 거동도 못하는 우리에게 외부와 접촉할 수단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119에 긴급구호를 요청해야 하지만 휴대폰이 한개도 없었고 별장 자체의 전화도 구비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이 밤을 고통 속에 지내며 서서히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주최 측의 요청이 있었다고 해도 누구 하나쯤은 휴대폰을 지참할 만도 한데 어느 누구도 지참한 사실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 아직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회장은 그 와중에도 “여기 안 왔으면 지금쯤 마작을 하고 있을 텐데 ”하며 신음 중에도 중얼거려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샀다. 죽어가는 와중에 마작을 생각하다니 어이없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구도 죽음의 순간에 의미 있는 생각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의식을 잃어갔다. 죽음에 이른 자들이 본다던 환한 빛을 보았으며 어둠의 터널을 뚫고 광명의 세계로 들어갔었다는 공통의 경험을 하였다. 고시인의 초대에 무심코 응한 것이 이렇게 허무한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인근에서 동계 야간 훈련을 하던 씨름선수들이 마실 물을 얻으려고 별장 문을 두드렸다가 쓰러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목숨은 건졌으나 그 사건은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거의 한달 동안 위성방송에서 이 사건을 연일 취재하였다. 우리 모두는 대중 앞에 까발려졌고 사생활이 노출되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졌다. 차라리 그때 별장에서 죽는 것이 더 나았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고시인의 음모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떤 사람들이 왜 초대되었는지, 참석한 사람들 누구와 누가 원한 관계 내지는 치정관계에 있었다든지,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참가자들이 진보성향의 인사들이었던 관계로 진보 진영에서는 고미란 시인이 보수 성향의 전 협회장을 몰아낸 데 대한 보수진영의 음모를 의심했고, 보수 쪽에서는 진보진영에서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며 응수했다.

아무도 우리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지방대학 홍교수는 검찰에 불려가 한 달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런 시련의 시기가 한 달 정도 지나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우리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멀어져갔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우리는 정식으로 모임을 결성했다는 것이다. 모임의 이름은 죽향회. 대나무의 곧고 바름을 이어받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날 있었던 죽음의 향연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모임 명칭이 죽.향.회로 낙착되었다.

이제 그 죽음의 향연이 있은 지도 2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때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이제 밝히고자 한다. 그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는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밝혀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겨레의 창간주주였다는 사실이다.

신문 방송에서는 우리의 사생활이나 선정적인 기사거리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서로를 잇는 소중한 끈이었다. 이제 와서 아무려면 어떤가? 죽향회는 2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끈끈하며 모두 사회에서는 은퇴했지만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고미란 시인은 이따금 남아프리카에 가서 가족들과 더불어 70대의 노후를 즐기고 있고, 마회장은 90대 중반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 마작을 하며 밤을 지새우며 지내고 있다.

하상희 국장은 서울시 민정 부시장을 지내다가 진보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 민정 수석을 역임하였고, 박성길 화백은 죽음의 향연이 있고난 후 갤럭시 아이패드 화가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박화백의 소원은 자신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치러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하상희 국장이 어떤 일이 있어도 들어주마고 약속하였으니 기대해도 될 듯하다.

출판협회 서군삼 부회장은 등산을 좋아하더니 히말라야 등반을 몇번이나 하였고, 베테랑 기자였던 유일근 기자는 유력 일간지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여류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였던 문지희 시인은 대외 활동도 활발하여 방송계에 진출하더니 어느덧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MC로 성장해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죽음의 향연을 겪은 이후에 뜻하지 않게 모두 잘 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10년 사이에 한반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죽음의 향연이 있은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인 2025년에 대한민국은 그렇게도 염원하던 통일을 이뤄냈다. 그것도 참으로 기적 같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어제는 죽음의 향연이 있은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다시 수락산 별장에 모여 조촐한 자축 파티를 벌였다. 월간지 편집국장이었던 하상희의 건배사로 건배를 하며 우리는 힘껏 외쳤다.

"죽향회를, 위하여!"

"통일 대한민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편집 : 오성근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심창식 주주통신원  csh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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