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11월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는 ‘양김 시대’ ‘3김 정치’의 마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겨레> 창간과 3김의 인연을 회고해봤습니다. 1988년 창간 사무국 시절부터 발전기금 모금에 앞장섰던 박준철 사우(인터넷신문 <중부투데이> 사장)의 글입니다.


1988년 3월 1일 성유보 초대 편집위원장의 전화를 받고 안국동의 <한겨레> 창간 사무국을 찾았다. 오늘부터 당장 출근을 하란다. 업무는 주식관리실, 무엇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부서 배치를 받았다. 1976년부터 기독청년운동을 하면서 동아투위, 조선투위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인연으로 87년 <한겨레> 1차 기금 모금 때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총무를 하면서 모금에 협력을 했던 것이 입사하게 된 동기였다.

창간 자본금 50억원이 모아진 뒤 주식관리 업무와 창간위원회 간사, 지령 100호 기념 임시주주총회, 지령 100호 기념 행사, ‘한겨레 논단’ 발행 등등 많은 일들을 했다. 윤활식 주식관리실장을 비롯 태광훈·이근영·임종심·송금자·최선남 사우와 함께 안국동 사옥에서 밤을 새우며 2차 발전기금 업무를 진행한 기억도 새롭다.

1988년 9월 이사회에서 100억을 목표로 2차 발전기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광고 제작 및 기금 모금 방안에 대해 매일 긴급회의를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모금 실적이 괜찮았다. 첫 한달 만에 10억원이, 11월에는 8억원 정도, 12월에는 6억원이 걷혔다. 그런데 해가 넘어가면서 모금 동력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1989년 1월초 조영호 기획이사와 협의 끝에 주식관리실만으로는 발전기금 모금에 한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모금운동이 새로운 동력을 얻으려면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 신문에 모금 광고 캠페인과 더불어 ‘모금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추진 계획서를 이사회에서 결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드디어 그해 1월17일 ‘36차 이사회’에서 모금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성유보, 간사 겸 실무를 맡고  김선주·홍수원·황윤미 위원으로  1차 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뒤 고희범·윤석인 기자가 2차로 합류했다.
 
앞서 1988년 10월께 나는 두 야당쪽에 도움을 청했다. 그때 여의도 <한국방송>(KBS) 뒷편에 있던 국희의원 사무실은 <한겨레> 발전기금을 홍보하고 모금하기에 마춤한 장소였다.
 
우선 기독청년운동을 하면서 오랜 인연을 맺어온 박영숙 평화민주당 부총재의 국회 의원회관을 찾았다. 마포의 평민당 당사에도 이틀에 한번꼴로 들렀다. 재정 담당인 이경배 총무국장과 김병오, 한영애씨 등도 만나 김대중(DJ) 총재가 발전기금을 내야 <한겨레>가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유종근, 배기선 의원 등도 만나 설득했다.
그러자 그쪽에서 처음에는 500만원을 내겠다고 했다. 안 된다고 했다. 김영삼(YS)쪽에서 ‘2500만원을 내겠다고 약속했다’고 둘러했다. 그러던 중 이경배 평민당 사무 부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총재께서 3000만원을 내기로 결정을 했고, 우선 1000만원을 줄테니 당사로 오라고 했다. 와이에스쪽의 2500만원 보다 500만원이 많은 3000만원으로 결정된 것이다.

▲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5월15일 창간호 2면에 실린 사진. 왼쪽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서울 양평동 사옥 윤전실에서 14일 저녁 창간호 초판을 펼쳐보고 있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14일 낮에 편집국을 방문한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성유보 초대 편집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다음날 아침 발전기금특위에 디제이쪽에서 3000만원을 내기로 했다고 전한 뒤, 성유보 위원장은 송건호 사장 방으로, 나는 조영호 이사와 윤활식 주식관리실장에게 보고하고 평민당사로 달려 갔다. 1000만원 자기앞 수표를 받아드니 신이 났다. 1989년 4월께 드디어 ‘정치 거목’ 김대중 총재가 <한겨레>의 주주가 되었다. 디제이는 3천만원 모두 본인 이름으로 납입했다.

뒤이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도 <한겨레> 주주가 되었다. 나는 평민당 쪽과 거의 동시에 민주당 쪽에도 모금 제안을 했다. 인명진·권호경 목사 등을 만나 뜻을 전했는데 처음엔 참으로 어려웠다. 1988년 4월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3당으로 전략했기 때문에 더욱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 한겨레 자료사진


와이에스의 최측근 김동영, 최형우 의원을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85년 10월 17일 결성된 부천서성고문사건대책위원회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및 6월항쟁 때 두 의원은 상도동 실행위원으로, 나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 총무로 기독교계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과 민추협 사무실을 오가며 긴밀한 친분을 맺었다. 그런 인연 덕분에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어느날 통장을 확인해 보니 ‘김영삼 1000만원’이 찍혀 있었다. 애초 통일민주당 수석부총재 겸 사무총장이었던 김동영 의원이 ‘한겨레 발전기금’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와이에스는 ‘동교동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신문’이라며 시쿤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김동영 의원의 설득으로 1차 1000만원을 납입한 것이었다. 그러자 상도동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져 3000만원을 채웠다. 

공화당의 김종필(JP) 총재는 <한겨레> 주주는 아니다. 하지만 디제이, 와이에스에 이어 공화당 쪽에서도 500만원을 냈다. 제이피가 최측근 실세였던 김용환 부총재에게 소속 의원들 이름으로 납입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때 총재 비서실 차장이던 강태룡은 원래 안기부 요원으로 힌국기독청년협의회 담당을 하다가 정치권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강태룡은 김용환 부총재 등과 협의를 한 끝에 기금을 냈고, 그렇게 해서 20여명의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 <한겨레> 주주가 되었다.

88년 5월15일 마침내 <한겨레>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대 규모인 국민주주 6만5000여명의 힘으로 창간이 됐다. 그해 9월 3000여명의 주주가 참여한 가운데 ‘지령 100호 기념’ 임시주주총회를 유관순기념관에서 개최했다. <여성신문>과 <내일신문> 등도 <한겨레>의 기금 모금 방식부터 주주관리 등 다양한 정책을 배워갔다. 또 국민주 공모를 했던 포항제철(현 포스코)도 광고 게재 등 한겨레신문사의 주주총회 노하우를 전수해갔다.

편집: 김경애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박준철 한겨레사우회원  jcp333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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