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정우열 주주통신원

죽어서 외롭다고 서러워 말 것이(無庸悲獨臥),
그대는 살어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在日己離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이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묘소 앞에서 읊은 시다.

1905년(광무 8년)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1908년(융희 3년)에 이 나라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 갔을 때, 매천은 이미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상실했다. 죽기 전에 한 번 더 영재 이건창의 무덤을 둘러보는 것이 마지막 한풀이로 남았다.

이건창은 한말 양명학의 주류인 강화학파의 핵심 인물로서 지식이나 지략보다는 충성과 행동을 중시하고, 형식보다는 기절(氣節)을 강조했던 당대 보기 드믄 꼬창꼬창한 선비였다. 또한 그는 당대 유명한 시인으로 매천은 그에 의해 시를 추천 받았다. 그러니 영재는 그의 스승이나 진배없다. 그래서 그는 구례에서 서울까지 천리길을 혼자서 걸어 그의 무덤을 찾은 것이다. 1910년의 일이다.

서울 화동으로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을 찾고, 강화도 사기골로 경재(耕齎) 이건승(李建昇,1858-1924)을 찾아, 셋이서 건평리 어느 초가집 뒤켠에 애무덤처럼 누워 있는 영재의 무덤을 찾았다. 매천은 으악새 우거진 풀밭에 다소곳이 술잔을 부으면서 위의 시를 읊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일합병 체결 소식을 듣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1915-2005)교수는 그의 저서 <강화학의 최후의 광경>(우반, 1994)에서 “일찍이 하곡(정제두)과 원교(이광사), 신재(이영익), 초원(이충익), 그리고 대연(이면백), 사기(이시원) 등이 이 벽진 곳에서 양명학을 가꾸어 오기를 무릇 250년, 나는 그것을 온통 ‘강화학’(江華學)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계산지학(稽山之學), 정백자성명지학(程柏子性命之學)이라고 부르고 때로는 ‘실학’이라고 부를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민 교수는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강화도에 내려와 양명학을 연구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전승시킨 가학(家學)을 ‘강화학’이라 칭했고, 그 학맥을 이은 학파를 '강화학파'라 불렀다.

그 뒤 1995년 처음으로 한국양명학회가 발족되었고, 2004년부터 하곡 정제두 선생이 후학을 양성한 강화도에서 ‘강화양명학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10년에는 ‘하곡연구원’(원장, 이경룡)을 개원하여 250여 년 간 면면히 이어져 오다 끊긴 ‘강화학파’의 맥을 다시 있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강화양명학의 발원지를 꼭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허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9월 마지막 날, 30일 마침내 시간을 내어 내가 주관하고 있는 경동14 동우회 역사탐방팀을 이끌고 이 강화학의 발상지를 찾았다.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간 뒤라 하늘은 더욱 맑았다. 나들이하기엔 더 할 나위 없는 좋은 날씨다. 강화 터미널에서 오후 1시에 만나기로 했다.

2호선을 타고 신촌역에서 내려 3000번 버스를 타면 강화터미널에 도착한다. 나는 신촌으로 가지 않고 집앞(한강신도시 장기동 우남퍼스티벌)에서 버스를 타고 직접 터미널로 갔다. 허나 아직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30분 전이다.

이때 누가 “혹시 강화학 유적지를 찾아 오시는 분 아니세요?”한다. 알고 보니 하곡연구원 원장 이경룡 선생이시다. 선생은 오늘 아침에 나로부터 내가 오늘 그곳에 가겠다는 전화를 받고 마중 차 나온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실 아무런 정보 없이 그리고 안내 없이 그곳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난 지난 7월에 강화군 문화관광과에 찾아가 안내를 의뢰했더니 하곡연구원 원장 이경룡 선생을 소개해 준 것이다. 그러니 이경룡 선생과는 전화로만 통화했지 직접 대면 한 적이 없어 처음이다.

“아, 이경룡 선생님이시로군요. 전화상으로만 통화했는데, 이렇게 뵙게 돼 반갑습니다.” 우리는 몇 년 지기지우(知己之友)라도 만난듯이 몹시 반가웠다. 경산, 향산, 탄월, 우사가 시간에 맞춰 댔는데 송암이 제시간 보다 좀 늦게 도착했다. 범산은 시간을 잘못 알아 신촌에서 1시에 출발 했단다. 더 기다릴 수 없어 이원장의 안내를 받아 우선 식당으로 갔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5분가량 가니 고려궁지가 있고 그 앞에 ‘왕자정묵밥’이란 간판이 있다. 이집은 강화 전통 음식으로 묵밥, 콩비지, 젓국갈비가 전문이다. 우리는 젓국갈비에 동동주를 곁들여 우선 시장기를 메꿨다. 젓국갈비는 돼지갈비를 두부와 함께 넣어 새우젓 젓국으로 폭 끓인 일종의 전골이다. 생큼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가을 하늘같이 깔끔하다.

강화도는 고려궁이 있던 곳으로 고려시대 문화전통 유산이 잘 보전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전쟁 때 개성 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피난 와 살기 때문에 개성 전통 음식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 젓국갈비 역시 다른 곳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이곳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별 음식이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 범산이 찾아 왔다.

점심을 마친 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 원장이 정성껏 준비한 ‘하곡학 유적지 답사(2014년 9월 30일)자료를 읽은 뒤 이 원장의 오늘의 답사계획 설명을 들었다. 우선 먼저 양도면 하일리 하곡 선생 묘소를 찾아 나서기로 하고 이 원장의 지시에 따라 문화원에서 내준 차에 올라탔다.

얼마쯤 가니 언덕이 나왔다. 하오고개란다. 그때 이 원장이 언덕 오른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것이 하곡 신도비예요” 하였다. 가리키는 쪽을 보니 과연 거기 신도비가 보였다. 신도비를 오른쪽으로 두고 고개를 넘으니 주차장이 나선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행길을 건너 언덕으로 올랐다. 거기 두 분상의 산소가 있었다. 뒤 조금 평평한 곳의 산소가 하곡의 산소이고, 앞의 옹색한 산소가 아버지 정상징과 어머니 한산 이씨의 묘소란다. 우선 하곡 선생 묘소로 가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께 절을 올렸다. 묘 앞에는 상석이 있고 오른 쪽에 비석이 있다. 비석엔 ‘成均館祭酒’를 했다는 직함이 써 있다.

누가 ‘祭酒’를 ‘제주’라 읽는다. 허나 이것은 제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좨주’로 읽어야 옳다. 좨주는 정3품 벼슬이다. 그리고 좌우 양편으로 문무석이 있는데 문양이 아름답다. 그런데 오른 쪽 문인석의 코가 없어졌다. 아마 누가 속설을 믿고 코를 잘라간 모양이다.

상석은 다른 곳에 비해 일반적으로 작다. 이 원장은 그 이유를 “강화도는 풍수적으로 못 속에 떠있는 배의 형국이어서 돌이 크고 무거우면 배가 가라앉는다 하여 상석을 작게 한 것이랍니다”라고 설명한다. 아래 아버지 산소는 자리가 협소해 비석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측면으로 세웠다.

일행 중 누가 말했다. “아니 일반적으로 아버지 밑에 자식을 써야 하는데 어째 이리 썼을까? 역장인데…” 이 말을 들은 이 원장이 말했다. “그래요. 역장이에요. 헌데 원래는 여기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던 것인데 이곳으로 이장했대요. 당시 이곳으로 이장할 때는 이 산소 앞까지 바다였답니다. 그래서 앞이나 옆으로도 쓸 수 없고 그렇다고 위로도 쓸 자리가 없어 할 수 없이 이렇게 썼답니다.” 아버지 정상징은 하곡의 나이 다섯 살 때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하곡은 할아버지 정유성(鄭維城,1596-1664)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우의정 벼슬을 지냈다. 이때 우사가 “그럼 하곡이 왜 이리 와 살았나요?”하고 물었다. 하곡이 강화도로 온 것은 할아버지 때문이란다. 할아버지는 강화 도촌(陶村)이라는 부락에서 살으셨단다. 도촌은 창령 황씨의 집성촌으로 할아버지의 처가마을이다. 하곡 묘소 맞은편에 할아버지 정유성의 묘소가 있다고 하는데 숲이 우거져 갈 수가 없어포기 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다음 답사지인 신대우 선생이 20년간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공숙(共塾) 터를 찾아갔다.

신대우는 하곡의 손녀사위이다. 허나 옛 터는 찾아 볼 수 없고 마을 이름만 ‘공숙리’(共塾里)로 남아 있다. 공숙터에 대해선 앞으로 더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 다음 행선지는 원래 길상면 선두리 이충익의 묘소였으나 시간이 촉박해 다음으로 미루고 화도읍 사기리로 차를 몰았다.

덕촌 내포리란 안내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차를 돌려 얼마쯤 달리니 길가에 탱자나무가 있는 이건창의 생가 마을이 나온다. 앞에는 수령이 몇 백 년이나 된 듯한 향나무가 세 그루 우뚝 서 있다. 마치 영재의 기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복원한지 얼마 되지 않는 듯한 생가 안채에 ‘명미당’(明美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밖으로 나오니 옛날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건창은 보성에서 귀양길이 풀리자, 벼슬길을 하직하고 강하도 이곳으로 낙향해 살았다. 갑오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마흔 셋일 때이다. 그는 그때 그가 그렇게 자랑하던 ‘월사매’(月O梅; 월사 이정귀가 명나라 사신 갔던 길에 북경 곤명원에서 나눠 가져 온 ‘악록’이란 선인의 별명을 가진 매화나무)를 이삿짐 위에 조심스럽게 얹어서 뱃길로 양화 나루에서 이곳 사기리까지 가지고 와 사랑채 마당가에 심었다.

그러나 매화는 시들시들해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죽은 듯했다. 그러다 뿌리를 내린지 12년 만인 을사년(1905) 겨울, 한동안 죽은 줄만 알았던 매화나무가 왕창 꽃을 피웠다. 매화를 심은 이건창이 죽은 지 이미 7년이 지난 뒤이다. 이때 아우 이건승이 이 소식을 구례 매천에게 알렸다 한다. 그뒤 이 매화는 문원 홍승원에 의해 분재돼 진천의 여러 맹우들에게 접붙여 나누어졌단다.

우사는 아까부터 그 월사매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월사매를 찾지 못했다. 우사는 월사 13대손으로 선조의 이 매를 찾기 위해 올봄에도 처음에 중국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창덕궁에 가서 찾아봤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사는 혹시 오늘 이 매를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여기저기 찾은 것이다. 허나 여기서도 끝내 찾지 못했다. 집 오른쪽으로 잘 치장한 산소 둘이 있다. 위의 산소는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촌조(入村祖) 전주이씨 덕천군파 이대성의 묘이고, 그 밑은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의 묘소이다.

이시원은 철종 때 판서를 지내신 분으로 병인양요에 불란서 군대가 쳐들어오는데도 관군이 지키지 않고 도망가 마침내 강화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아우 이지원과 함께 음독자살 하였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4시가 넘었다. 서둘러 차를 또 몰았다. 다음 답사지는 사기리의 계명의숙 자리이다.

이원장은 이건창의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서 차를 세우게 한 뒤 우리를 숲속으로 인도했다.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주위에는 탱자나무가 노랑탱자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저기 우물이 있죠. 저 우물이 당시 사용하던 우물예요.”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정말 우물이 있다. 건물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계명의숙은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이 1906년 그의 나이 46세 때 6촌형 이건승 등과 함께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며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다. 이건승이 만주로 떠난 뒤 이건방이 혼자서 의숙을 운영하다 난곡도 48세 되던 1908년에 강화도를 떠나 서울 화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위당 정인보, 육당 최남선, 석전 박한영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다. 우리는 서둘러 건평리 이건창의 묘소를 찾았다.

교회 앞에 차를 세우고 맞은편 언덕으로 올랐다. 집 뒤에 묘가 하나 누워 있다. 바로 매천이 찾았던 이건창의 묘소다. 매천이 갔을 때의 그 초가집은 지금은 슬레이트로 바뀌었으나 초라하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묘소에 염소를 매어 길렀었는데 송영길 시장 때 일대를 매입해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주위에 소나무도 심고 축대를 쌓아 돌계단으로 산소를 올라가게 했다.

우리는 매천이 구례에서 찾아와 산소 앞에서 읊었다는 앞의 그 시를 생각하며 묵념했다. 그리고 오늘 수고해 준 이경룡원장께도 큰 박수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오늘의 역사 탐방을 마무리 했다.

강화군은 이곳이 하곡학파가 탄생하여 학맥을 이어오면서 학술과 경세를 주창해온 조선 심학의 성지라는 긍지를 가지고, 앞으로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중국의 양명학과 함께 동아시아의 심학을 대표하는 하곡학을 세계에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다. 금년에는 278주기 하곡제가 10월10일에 있고, 제11회 강화양명학 국제학술대회가 10월11일에 있다고 한다.

정우열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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