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우열 주주통신원

어느 날 신부님이 예전 주임신부로 있을 때 성당의 잘 아는 자매님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아, 여보세요. 아네스 자매님이시죠?” 그때 전화 속에서 흑흑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이고. 신부님… 흑흑…”

신부님은 당황했다. “신부님, 글쎄 말예요. 제가 20년이나 애지중지 키우던 개가 죽었어요. 흐으윽 흐으윽…”

“아, 그러셨군요. 참, 안됐네요. 어쩌다 그렇게…” 신부님은 자매님의 울음소리를 듣고 당황한 나머지 딱히 그 자매님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얼버무리듯 그렇게 대답하고 “그럼, 다음에 언제 한번 만나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신부님은 자매님이 개가 죽어 운다는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부님은 어려서 농촌에서 자라...며 여름철이면 부모님들이 개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개는 의례 잡아먹는 것이라고 인식된 신부님에게 개가 죽었다고 우는 그 자매님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개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그 자매님에게 “아니, 개가 죽은 걸 가지고 뭘 그러세요. 우리 집에선 갤 잡아먹는데…”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신부님은 전화를 끊고 바로 문자로 메시지를 보냈다. “아네스 자매님, 정말 안됐군요. 내가 갈 때면 그렇게 꼬리치며 반가워하던 그 크롱이 죽었다니요…”

허나 사실은, 신부님은 자매님 집에 방문 할 때 크롱이 꼬리를 치고 반가워하면 개를 싫어해 때리곤 했다. 그런 신부님이 마치 개를 몹시 사랑이라도 한듯 그런 메시지를 보내다니. 그 뒤 신부님은 아네스 자매님을 만났다. 자매님은 신부님을 보자마자 “신부님, 그때 전 신부님 전화 안 받았으면 무슨 일 날 뻔 했어요. 사실 미칠 지경이었거든요. 바로 신부님 메시지 받고 슬픈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마음이 평온해 졌어요. 신부님, 정말 감사해요.” 하며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칠레의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트 마투라나는 “모든 생명은 세상을 인지하는 자신의 능력에 맞춰 세상을 구성한 뒤 그 틀로 사물을 본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모든 세계관이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극단적 상대주의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허나 마투라나는 여기에서 개인적 차원의 생존이 사회적 차원의 공존으로 이어진다는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생물학을 넘어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의미 깊은 통찰력을 제시한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모든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 세계, 즉 자신만의 ‘섬’에 갇혀 서로 간에 폐쇄적이라면 소통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에 마루타나는 ‘관용’보다 ‘존중’이라고 답한다. 만일 신부님께서 자기의 경험적 바탕에서 자신의 세계만을 옳다고 고집하면서 자매님에게 관용만을 베풀었다면 자매님의 그 슬픈 감정이 풀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관용’보다는 상대방의 세계와 그 환경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획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만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믿지 않는 선의의 많은 사람도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이다. 그래서 난 대학에서 의료윤리를 강의 할 때 이 비유를 늘 인용하곤 했다.

이 비유의 보편적인 호소력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사랑의 계명을 감지하게 된다. 고통에 빠진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이나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어떤 높은 지위에 있든, 얼마나 많은 지식과 언변을 지녔든, 그는 가장 중요한 ‘인간다움’을 잃은 자이다. ‘인간다움’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의 근원이자 행동의 기준이다. 신부님이 자매님을 고통으로부터 구한 것은 비록 자매님의 감정을 이해하지는 못했더라도 고통에 빠진 자매님에 대한 연민의 정과 사랑으로 자매님을 감싸안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로써, 왜 우리가 자주 인간다움을 잃고 사는 지를 깨우쳐 주신다. 그것은 요즘 현대인들이 점점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잃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의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상관없는, 굳이 마음 쓸 필요 없는 익명의 ‘타인’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엔 나와 무관한 ‘타인’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언젠가 만날 ‘이웃’으로 존재한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이웃의 얼굴’을 보는 것, 그것이 보편적 윤리이다. 또한 그 윤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겨 주신 ‘사랑의 계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그리스도의 길이다.

요즘 인터넷이나 보수 신문을 보면, 세월호 유가족이 단식 농성하고 있는 광화문 광장에 가서 함께 동참하는 시민, 학생 및 종교인은 물론 신부나 목사, 수녀 등 성직자들에까지 악성 글이 올라오고 있다. 마치 이들을 반정부적 이단자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의 동참은 고통에 빠진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나온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이 ‘인간다움’을 잃은 자들이다. 경계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들이다.

정우열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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