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정우열 주주통신원

가을비가 주적주적 내리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이런 때면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난 어제 아내와 함께 보건소에 가서 독감 예방 접종을 하고 왔다.

오늘은 비가 온 뒤라서 그런지 하늘이 몹시 맑고 쾌청하다. “여보, 우리 서울 나들이나 갑시다. 이 맑은 날에 집에만 있지 말고.” 내 말에 아내 한솔 선생은 아까부터 무언가 쓰고 있던 글씨를 멈추고 나를 향해 “아니 어디 좋은 데 있어요?”하며 반긴다. “암, 있죠. 당신이 좋아하는 곳.” “어딘데 그럼 갑시다” 아내는 옷을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선다.

내 아내 한솔은 한글 서예가다. 한솔은 그의 아호(雅號)이다. 즉 예명(藝名)이다. 그래서 난 그를 한솔 선생이라 부른다. 나는 한솔 선생과 틈만 나면 인사동에 나가 전시회 보기를 즐겨한다. 때맞춰 요즘 박물관이나 미술관, 그리고 갤러리에서는 가을 전시회가 한창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볼거리가 많다.

특히 올 가을엔 추사 글씨를 아끼는 이들에겐 아주 행복한 계절이다. 추사체 글씨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두 전시회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 ‘추사정화’(秋史精華, 26일까지)이고, 다른 하난 서울 견지동 불교중앙박물관의 특별전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12월 14일까지)이다.

내가 한솔선생에게 볼거리가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두 추사 전시회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전시회를 하루에 다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오늘은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 전시만 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난 한솔 선생과 손을 맞잡고 아파트 단지를 걸어 정문 앞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어느새 단지 내 나무들이 곱게 물들었다. 그때 6117번 엠버스가 사거리 저쪽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서울역까지 가는 버스다. 서둘러 정류장으로 갔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올 땐 서울 나가려면 애를 많이 먹었는데 요즘은 교통이 많이 편리해 졌다. 이 엠버스를 타면 바로 서울역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차가 정류장에 멈췄다. 차에 올라탔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좌석이 많이 비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차는 한강을 왼쪽으로 끼고 강변도로를 달려 합정동, 홍익대, 신촌오거리, 충정로를 경유해 서울역 우체국 앞에 닿았다. 약 1시간이 소요 되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지하철 1호선을 타려고 지하철 입구 쪽을 찾아 걸었다. 그때 우체국 맞은편 상가로 내려가는 지하도 입구 벽에 한 늙은 노숙자가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었다. 텁수룩한 턱수염을 늘어뜨린 그의 눈빛이 형형했다. 난 유심히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떠올랐다. 제국주의 욕망의 발현자인 알렉산드로스가 뭐든 해줄 테니 말하라고 했을 때, 그는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좀 비키시지”라고 말한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칭하며 자기 삶의 주인인 자만이 누리는 파격과 자유를 온몸으로 살았다.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좀 비키시지”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래서 난 멈칫했다. 그가 기대고 앉은 벽 시멘트 바닥엔 붓글씨로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부자이면서 나쁜 놈은 정말 나쁜 놈이고 가난하면서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 거지야 구걸하라, 탐욕스런 세상에게 너 자신을 희생해서 너를 위해, 남을 위해, 미움 없이, 원망 없이 착하게 구걸하라”

“가난하면서 착하다면 정말 착한 사람이다. 그깟 백년 끝까지 버틴다.”

난 한참 동안 글귀를 뜯어 읽어 보았다. 비록 띄어쓰기나 문장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그가 호소하는 내용은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부자이면서 나쁜 놈’, ‘가난하면서 나쁜 놈’. 나쁜 놈에도 차이가 있다 했다. 나쁜 놈이라고 해서 다 나쁜 놈이 아니란 말이다.

부자이면서 나쁜 놈은 죄악이지만 가난하면서 나쁜 놈은 생존의 수단이다. 구걸하는 것이 죄악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열심히 남에게 피해 끼치지 말고 착하게 구걸하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겨우 백년인데 그깟 백년 착하게 못살겠는가? 마치 노숙자들의 행동강령 같았다. 돈 있는 사람이 착한 건 착한 게 아니다. 정말 착한 건 돈 없어 가난하면서도 착한 일 하는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이다.

차가 어느새 종각을 지나 종로3가역에 도착 했다. 인사동 골목을 빠져 나가 조계사로 가니 입구부터 국화로 온 경내가 꽉 찼다. 국화전시회가 한창이다. 국화향기를 맡으며 오른쪽 박물관 지하 전시장으로 내려갔다.

이 전시는 추사가 만년 과천 초당에 은거하며 왕래했던 서울 삼성동 명찰 봉은사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펼친 것이다. 전시장은 ‘도심속 천년고찰, 보은사’, ‘김정희와 봉은사의 만남’, ‘김정희를 통한 유학과 불교와의 소통’, ‘근-현대의 보은사’ 등 네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 됐다.

봉은사는 원래 견성사란 작은 절이었는데, 정현왕후가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절을 확장하고 봉은사로 개칭한 것이란다. 1501년에는 정현왕후의 명으로 봉은사에 왕패를 하사하며 왕릉 추복사찰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1550년에 문정왕후가 선교양종을 되살리고 봉은사를 선종수사찰로 삼았으며 1552년 승과를 봉은사에서 다시 시작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봉은사는 전소되어 선화스님과 경림스님이 중심이 되어 중창하였으며, 이후에도 봉은사의 중창과 중수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선종수사찰로서의 봉은사의 위상은 계속 이루어졌으며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 봉은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김정희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다녀온 이후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 은거할 때부터이다. 원래 김정희 집안은 화암사란 원찰을 둘 정도로 일찍이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33세(1818년)에 해인사 대적광전의 상량문을 지을 정도로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우선 전시실로 들어가니 맨 먼저 ‘판전’(板殿)이란 현판 글씨가 반갑게 맞는다. 이 판전은 봉은사 장경각의 현판 글씨로 내가 즐겨 찾던 글씨다. 이 글씨는 완당이 죽기 3일전 쓴 유언 같은 글씨다. 어떤 속된 기운과 기교도 없는 고졸한 기운이 속속 배어든 이 글씨는 추사체의 완성을 상징하는 마지막의 불꽃과도 같다. 아내 한솔 선생은 이 글씨를 평해 그의 논문 <한글 궁체 형성과정 연구>(2003)에서 ‘통자아의 경지’라고 했다. 자아를 넘은 무상의 경지다.

옆에 도반스님인 듯한 두 스님이 이 현판 앞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얼마 동안 머물러 떠날 줄 모른다. 사실 오늘 여기 전시된 이 판전 현판은 진품이 아니라 탁본이다. 그럼에도 이 현판은 많은 관람객을 사로잡아 걸음을 멈추게 한다. 경북 영천 은해사에 써준 불광(佛光), 대웅전(大雄殿)편액과 현판들, 33살에 쓴 걸작인 해인사 대적광전 중수기 금니명문이 전시되고, 유마거사를 자처했던 그가 덕 높은 스님들과 교유했던 묵적의 기록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을 통치원리로 내세워 불교에 대한 강력한 억압정책을 펴왔다. 그럼에도 조선에서 유학자와 스님간의 교유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에 탈주자학적인 성향을 가진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스님들과의 교유를 넓혀갔다.

추사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다. 그는 성리학을 사상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다양한 학문의 흐름을 포용하였으며, 많은 스님들과 불교에 대한 담론을 벌였다. 그는 초의스님과 도반이라 할 정도로 40년 세월 동안 교유했으며, 당대의 스님들과 정밀하고 폭 넓게 교류하였다. 그리고 당시 불교 내에서 일어난 선학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오늘 전시된 이 작품들은 주로 당시의 이 유묵들을 전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전시회를 통해 그가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학, 옛 고승들의 행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만큼 매우 해박한 지식인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전시실인 ‘근-현대의 봉은사’ 전시실로 들어갔다. 1911년 6월3일, 한국불교는 일제의 식민지 불교체제로 편입되고 사찰 운영의 일체를 일제가 갖게 되면서 전국의 사찰을 30본산으로 정하였는데 봉은사는 서울-경기 일대의 본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반포 후 봉은사의 첫 주지로 취임한 청호스님(1875-1934)은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섰다. 특히 1925년 7월17일, 한강을 덮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홍수 때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워 708명의 인명을 구하고 재물을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포교당을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펼쳤다. 또한 1972년 동국역경원의 역장이 들어오면서 역경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현대적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1983년 추사 김정희 탄생 200주기를 맞이하여 기적비를 세우고 1996년에는 미륵대불이 조성되는 등 전통사찰의 보존 속에서 도심사찰로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전시실에선 주로 당시의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회는 12월까지다.

이렇게 우리 내외는 이 전시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나와 다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 인파 속에 지하철 정류장을 찾아 5호선을 타고 공덕역에서 다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집으로 왔다. 추사와 대화 할 수 있었던 즐거운 하루였다. 허나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내내 서울역 앞에서 만난 노숙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자이면서 나쁜 놈은 정말 나쁜 놈이고, 가난하면서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이다.”

10월22일 ‘2014 아시아미래포럼’ 기조연설에서 타르야 할로넨 전 핀란드 대통령은 지속 가능 경제의 핵심은 모든 여성과 남성이 성장에 참여하고 성장의 혜택을 누리게 함으로써 인간의 재능을 극대화하는 성장 패턴을 만드는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들고 나온 창조경제의 핵심이 사람이란 가치인 만큼 ‘사람 보호’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추사는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고 했다. 솔바람이 허산 능선을 타고 내려와 우리 내외를 반갑게 맞아 준다.

정우열  jwy-han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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