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모범으로 생을 사셨던 그를 폄하하는 세간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남도의 보길도를 왜 택하고 거기에서 살았는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이 책을 냈습니다.” 
향토사학자이자 완도 토박이 낚시꾼 정영래씨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내용을 쉽게 풀어 쓴 책 <낚시꾼이 풀어쓴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2015년 12월, 샘물, 15,000원)를 냈다. 

<어부사시사>는 윤선도가 65세 때(1651년) 가을 벼슬을 버리고 남도 보길도(甫吉島)에서 지내면서 지은 노래다. 윤선도(1587-1671)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그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보길도의 사계절을 각각 10수씩 40수로 노래(春詞/夏詞)/秋詞)/冬詞)한 것이다. 원래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漁父歌)>를 이현보가 <어부사(漁父詞)>로 다듬어 고친 것을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 여음을 넣은 것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든 것은 51세 때였다. 병자호란(1637)이 일어나자 해남에서 의병을 모집해 왕자가 피신해 있는 강화도로 갔으나 임금이 그만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치욕을 감당할 수 없어 바다 건너 제주도로 가려다가 잠시 머문 곳이 보길도다. 그는 보길도의 뛰어난 선경에 매료되어 가족과 노복 등 1백 명과 함께 그 곳에 정착했다. 고산은 평생 세 번 모두 14년을 유배로 보냈다. 81세 때 겨우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보길도에서 지내다가 85세 되던 1671년 6월 눈을 감았다. 

“고산이 보길도에서 사망하였지만 세연정이나 낙서재, 무민당, 곡수당 등 그의 모든 재산은 해남윤씨 가문이 아닌 그와 함께 생활했던 학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고산은 조선의 진정한 선비로서 당쟁당파의 소란 속에서 평생을 고난과 고독 속에서 보내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평생을 검소하고 충직하게 사셨던 조선 선비의 모범생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한 후 130년 만에 정조가 그의 호를 내려 ‘고산’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나는 낚시를 좋아합니다. 며칠 전 낚시 갔다가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이 시조에 담겨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날 이후 어부사시사가 들어있는 책은 모두 사서 그 풀이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말과 한자가 섞여 있는데 그 해석 내용이 저마다 다르고 불충분하다고 느꼈습니다. 국문학 시조이지만 확실한 풀이와 뜻을 알려주는 책도 없습니다.”

저자는 그동안 나온 어부사시사 연구서들의 뜻풀이가 부정확한 것은 그들이 어부의 생활과 바다에 대해 잘 모르는 반면 자신은 보길도 앞바다에서 오래 낚시를 하면서 어부의 눈과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 해석이 더 맞을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제1장은 고산 윤선도의 삶과 어부사시사에 대해 해설하고 제2장은 사계절 전체 40수의 노래와 해설, 관련된 사진을 싣고 있다. 올 봄 보길도 여행을 계획한 주주라면 남도의 낚시꾼이 소개하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저자 정영래는 전남 완도군 수협을 퇴직하고 현재 (사)연안환경보전연합회 이사와 (사)장보고연구회 이사다.

이동구 에디터  do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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