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실크로드 문화 답사(4)]

미인박명(美人薄命),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했던가요? 당나라 6대 왕 현종은 절세미인 양귀비(719-756)를 아내로 맞은 후 그녀에게 푹 빠져 정치를 던져버렸습니다. 양귀비를 등에 업은 환관과 탐관오리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자 양아들이 반란(안사의 난)을 일으켰고, 이를 피해 도망가던 중 양귀비는 자결했습니다. 그녀 나이 37살이었습니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시인 소식(蘇軾)은 이 일을 소재로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양사에서도 양귀비만큼 유명한 여인이 있군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BC69-30). 이집트에 원정 온 케사르의 애인이 되었고, 그 후 케사르를 암살한 부르투스를 쫓아 이집트에 온 안토니우스와 눈이 맞았습니다.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정벌군은 이들의 사랑을 끝장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나이 39살때였습니다.

‘왕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昭君拂玉鞍) / 말위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上馬啼紅頰) /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今日漢宮人) / 내일 아침은 오랑캐 땅의 첩이 되는구나!(明朝胡地妾).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입니다. 춘추시대의 '서시(西施)',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貂蟬)', 당 현종의 비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역사상 '4대 미녀' 왕소군(王昭君)이야기입니다.

‘화친조약’으로 흉노 왕에게 시집보낼 공주를 골라야 하는 한 원제(元帝)는 가장 못생긴 후궁을 뽑아 보내라고 했습니다. 당시 한 원제는 화공(畵工)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그 그림을 보고 그때그때 간택했다고 합니다. 왕의 눈에 들려는 후궁들은 “예쁘게 그려달라”며 뇌물을 먹였습니다. 그러나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해 그럴 형편이 못되니 화공이 아주 '밉상'으로 그려놓아 단 한 번도 왕의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가장 못생겼다는 이유로 멀리 흉노 왕(선우 호한야)에게 시집간 왕소군이 사실은 미모가 빼어나고 비파(琵琶) 솜씨도 뛰어나다는 걸 뒤늦게 안 한 원제는 그림을 그린 화공은 물론 관련자들까지 모두 처형했습니다. 왕소군은 시집 간 뒤 천 짜거나 옷 만드는 기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줘서 흉노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국에 버림받은 몸이었지만 그녀는 흉노가 조국을 침략하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해서 그 후 60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멀리 타향 흉노 땅에서 왕소군은 행복했을까요?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왕소군이 한나라에 대한 그리움에 날로 여위어 감을 <소군원(昭君怨)>이란 시에 담았습니다.

(낯선)흉노(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胡地無花草) /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春來不似春) / 저절로 옷의 띠가 느슨해지니(自然衣帶緩) / 이는 허리(다이어트^^) 때문이 아니라네.(非是爲腰身)

기러기도 날개 짓을 멈춰 땅에 떨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왕소군. 결국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오르도스(Ordos) 지역에 묻혔지만 이곳은 현재 중국 내몽골자치구로 중국 땅입니다. 왕소군의 애절한 고국사랑의 바람이 죽어서 이뤄졌네요.

참~! 왕소군은 언제 죽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답니다. 미인이라 일찍 세상을 떠났을까요? ^^

(이 여행기는 이동구 팀장이 주주, 독자와 함께 한겨레 테마여행 <실크로드 문화답사>를 다녀온 후 지난 해 9월부터 페이스북과 개인 블로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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