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탑, 비림, 화청지 - 당(唐)과 실크로드

3. 대안탑, 비림, 화청지 - 당(唐)과 실크로드

 

무릉을 떠난 버스는 동쪽으로 길을 달려 서안 시내로 들어갔다. 중국의 도시들이 그렇듯 서안의 간선도로도 몇 겹의 환로(环路, 순환도로)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안쪽의 1환로는 둘레 13.7킬로미터에 이르는 서안성벽을 따라 돌고, 2환로는 36.7킬로미터에 이르렀다는 당 장안성과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은 그 바깥으로 한층 확대된 서안시의 3환로가 돌고 있다. 당 장안성보다 약간 규모가 작았던 한 장안성은 2환로의 서북쪽 바깥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항축(夯築, 판재를 사용하지 않고 정제된 흙을 순차적으로 켜켜이 다져 기단을 조성하는 기법)으로 쌓은 토성이 지금도 일부 남아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버스는 관중 땅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서안 시내로 들어간 뒤 2환로 남쪽 바로 바깥에 자리 잡은 대자은사(大慈恩寺)로 우리를 안내했다. 대자은사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고승, 현장(玄奬)과 관련되어 있다. 현장이 인도를 다녀온 뒤 이 절의 주지를 지내면서 저 유명한 대안탑(大雁塔)을 지었기 때문이다.

 

 

현장 이야기

 

▲ 서안 대안탑의 현장법사

현장에게는 대선배가 있었다. 한이 멸망한 뒤 400년 가까이 계속된 분열기에 동진(東晋)의 승려였던 법현(法顯)이다. 그는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경전을 구하기 위해 399년 장안을 출발해 난주(蘭州), 돈황,누란(樓蘭)ㆍ카라샤르ㆍ호탄ㆍ카슈가르를 거쳐 천축(天竺, 인도)에 도착했다. 15년간 30개국을 순례하고414년 바닷길을 통해 장안에 돌아온 법현은 『불국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다. 현장이 법현의 자취를 따라 천축 순례에 나선 것은 천하를 통일하고 다시 한 번 실크로드 제패를 추진한 당나라 때의 일이었다.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해 육로를 따라 인도로 간 뒤 645년 다시 육로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떠날 때만 해도 당 태종은 돌궐과 실크로드를 두고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개인이 허락 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금지 사항이었다. 따라서 현장은 국법을 어기고 나라를 탈출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는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현장이 떠난 지 1년 만에 태종은 몽골 쪽에 자리 잡고 있던 동동궐을 멸망시키고, 후한 말기에 끊겼던 서역 진출을 재개했다. 현장은 서역으로 가는 길에 투루판의 한족 망명 왕조 고창국(高昌國)에서 그 나라 왕 국문태의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바 있었다. 그의 설법으로 불교가 고창국의 국교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그런데 당은 640년에 고창국을 무너뜨리고 인근 교하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국문태는 당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죽었다. 서역에서 그 소식을 들은 현장은 투루판 대신 돈황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시 현장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며 낙양에 머물고 있던 태종은 현장을 불렀다.현장의 식견과 경험, 능력을 높이 산 태종은 그에게 환속해 고구려 원정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다. 고향인 소림사로 돌아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번역할 꿈에 부풀었던 현장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서역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망라해 정리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현장과 태종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태종은 서역 경략에 도움이 될 이 책의 편찬을 명하고, 현장은 환속 대신 이 명령에 따라646년 책을 지어 바쳤다.

 

648년 대자은사가 건립되었다. 태자 이치가 어머니 문덕황후를 추념하기 위해 세운 절로, 현장은 이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환속 요구는 계속되었다. 649년 태종이 병으로 죽은 뒤 고종으로 등극한 이치 역시 현장의 환속을 요구했다. 소림사로 들어가겠다는 현장의 희망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 말기의 대혼란을 겪은 당의 건국 세력은 불교를 중시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배척하기까지 했다. 태종과 고종 역시 현장 같은 인재가 불경 번역보다는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서안 대안탑

현장은 불경을 번역해 황제들에게 바치면서 그들을 설득하는 데 진력했다. 652년 서역에서 가져 온 불경들을 보존하기 위해 대자은사 경내에 지은 대안탑(大雁塔)은 그러한 설득의 결과물이었다. 이 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대탑과 모양, 규모에서 거의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종 때 인도식 건축물이 장안성의 전체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서 개축했다. 이후 무측천 집정기와 후당 대의 개축을 거친 뒤 17세기 명나라 때 탑 외부를 60센티미터 두께로 감싼 지금의 7층 전탑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비림 이야기

 

둘째 날은 비림(碑林)박물관에서 일정을 시작했다. 비림은 비석이 숲을 이룰 정도로 많다는 뜻인데, 서안의 비림은 곡부 공묘(孔廟, 공자 사당)의 비림, 태산 대묘(岱廟)의 비림과 더불어 중국 3대 비림으로 꼽힌다. 송나라 때인 1087년 서안 지역에 내려오는 비석, 화상석, 불상 등을 모아 처음 건립되었고, 청나라 때 처음 ‘비림’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1992년 서안 공묘 옛터를 합쳐 4900평방미터에 이르는 서안비림박물관이 정식 출범해 1만 1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고도 서안의 문화적 위용을 보여 주는 비림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석대효경(石臺孝敬)이다. 말 그대로 돌 받침 위에 올려놓은 비석에 유가의 경전인 효경을 새긴 ‘돌로 만든 책’이다. ‘개원의 치’라는 성세를 이룩한 당 현종이 큰 글씨는 예서체로, 작은 글씨는 해서체로 쓴 것을 높이 6미터의 비석에 새겨 넣었다. 아들의 빈이던 양귀비를 빼앗으면서 아들에게 효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야사도 전한다.

 

석대효경을 모셔 둔 비정(碑亭)에는 ‘碑林(비림)’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에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있다. 이 편액의 두 글자를 쓴 이가 청나라의 애국자 임칙서(林則徐)라는 설이 유력한 것이다. 임칙서는 흠차대신으로 광동성 광주에 가서 영국이 몰래 팔던 아편을 몰수해 태워 버린 사람이다. 그의 이러한 애국적 행동으로 인해 아편전쟁이 일어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청 왕조는 이런 애국자를 칭찬하기는커녕 전쟁을 유발했다고 해서 신강 지역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그가 신강으로 가는 길에 서안에 머물던 중 저 편액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편액의 ‘碑’ 자에는 일반적인 서법과 달리 삐침이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임칙서가 일부러 삐침을 찍지 않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글자를 완성하겠노라고 했다는 말도 한다. 삐침을 찍지 않은 것은 그 모양이 청나라 관모의 꼭지를 연상시켜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러한 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본래 당나라까지는 ‘碑’ 자를 쓸 때 삐침을 적지 않는 일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 활판 인쇄가 성행하면서 삐침이 들어가는 활자로 고정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정의 편액을 임칙서가 쓴 것은 사실일까?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림에서 임칙서가 쓴 석편이 발견되었는데 그 석편에 쓰인 ‘碑林’ 글자와 편액의 글자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이 편액의 서체는 당나라 서예가인 구양순의 것인데, 임칙서야말로 청나라에 알아주는 구양순 탁본의 대가였다는 것이다.

 

비림에서 만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는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龜趺)에 관한 것이었다. 모양이나 이름으로 보아 그것이 거북이 조각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는데, 현지 가이드가 사실은 거북이가 아니라 용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메모를 해 뒀다가 귀국 후 고대사 전공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서 여기 저기 알아보더니 고대에는 없었는데 명나라 때 전승 설화를 정리한 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써 놓았다고 알려 주었다.

 

‘용의 아홉 자식’으로 요약되는 이 설화는 육용(陸容)의 『숙원잡기(菽園雜記)』, 이동양(李東陽)의 『회록당집(懷麓堂集)』 등에 서로 다른 순서로 전한다. 그 가운데 양신(楊愼)의 『승암집(升庵集)』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용이 아홉 아들을 낳았는데 용이 되지 못했다. 각자 잘하는 게 있다. 첫째는 비희(贔屓)라 하는데 거북과 닮았고 무거운 걸 짊어지기 좋아한다. 오늘날 비석 밑의 귀부가 이 녀석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에 들어와 여러 전승을 종합한 왕문원(王文源)의 『중국길상도설(中国吉祥图说)』은 이 비희가 용의 여섯 번째 아들이라고 적었다. 용을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각종 고건축의 상징도 용과 관련해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비림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실크로드의 여행자가 빼 놓아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높이 279센티미터, 너비 99센티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철석의 이수(螭首)에 ‘大秦景教流行中国碑(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글씨와 함께 십자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비석이다. ‘대진’은 로마를 말하고 ‘경교’는 기독교를 말한다. ‘로마의 기독교가 중국에서 유행한 내력을 적은 비석’인 셈이다. 혹자는 경교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금지당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라고 한다. 그러나 경교 자체의 교리는 정통 기독교 교리와 다르지 않아 여기에도 의문은 있다.

  

781년 페르시아 출신 경정(景净, 본래 이름은 아담)이 지은 비문에 따르면 경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당 태종 때인 635년이었다. 아라본(阿羅本)이라는 선교사가 태종에게 경전을 바치자 태종은 감격하며 경교를 적극 권장하고 3년 후에는 장안에 경교 사원을 짓는 것을 허락했다. 이 기독교 사원은 처음에는 파사사라 불렸고 나중에는 대진사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경교는 당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했으나, 도교를 숭상한 무종이 845년 불교 등 외래 종교를 탄압할 때 함께 화를 입어 수많은 대진사가 파괴되었다. 무종의 연호인 회창을 따 이 사건을 ‘회창의 폐불’이라 하는데, 대진경교유행중국비도 그때 땅 속에 파묻혔다가 명나라 때 발굴되었다.

 

3대 세계 종교로 꼽히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다 들어와 번창한 것을 보면 과연 중국의 문화적 포용력은 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하나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받아들인 중국이 왜 외국에는 자신의 사상과 문화를 수출하지 않았을까? 중국은 비단, 도자기 등을 팔아 이익을 남기거나 종이, 화약, 나침반 등 과학기술의 성과를 유출했을망정 유교, 도교와 같은 고유의 사상, 종교는 거의 국경을 넘지 않았다. 이런 중국적 사상이 영향을 준 외국은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교와 도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유교는 사람 간,국가 간 불평등을 전제하는 사상 체계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가질 수 없었다. 더욱이 3대 세계 종교처럼 국가와 민족을 넘어 하층 민중들에게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평등사상이 결핍된 것은 유교의 결정적 약점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세계의 지도 국가로 거듭나려는 현대 중국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혜초와 고선지 이야기

 

비림을 떠난 우리 일행이 방문한 곳은 진시황 병마용갱이었다. 이곳은 시간적 혼돈을 피하기 위해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 당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을 즐겼다는 화청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청지가 이처럼 진시황릉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역사 공부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훗날 양귀비가 진시황의 황후였다고 기억하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답사 여행을 하는 이들이 늘 겪게 되는 골칫거리 중 가장 큰 것이 아닐까?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그들의 나이 차이만큼이나 많은 화젯거리를 낳으면서 천년 넘게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예전부터 소문난 온천이던 화청지를 양귀비에게 주고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던 현종 이야기는 화려한 가극으로 부활해 즐겨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 여행자의 관심은 그들의 사랑보다는 그들의 시대에 중국의 실크로드 개척이 어디까지 뻗어나갔는지, 어떤 영웅들이 활약했는지 하는 데로 쏠릴 수밖에 없다.

 

대안탑을 돌아볼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 태종은 107년 이후 유목민에게 빼앗겼던 타림 분지 일대를 다시 손에 넣었다. 640년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교하에 설치한 안서도호부는 8년 후 쿠차로 옮겼다. 쿠차는 서역북도의 한가운데 있는 실크로드의 요지로 후한이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것도 이곳이었다. 안서도호부 휘하에는 언기(焉耆, 카라샤르), 소륵(疏勒, 카슈가르), 우전(于闐, 허톈), 쇄엽(碎葉, 키르기스스탄 톡마크) 등에 안서사진을 설치해 실크로드를 관리해 나갔다.

 

712년 황제가 된 현종은 당의 전성기를 이끈 ‘개원의 치’로 알려진 명군이었다. 신라의 고승 혜초가 인도로 떠난 것이 그 현종의 치세인 723년의 일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 신라를 떠나 광동성 광주로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인도인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천축행 바닷길에 몸을 맡겼다. 말레이 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추측되며, 몇 년을 머무른 뒤 중국으로 돌아갈 때는 육로를 택했다.

 

인도 서북부에서 파미르고원을 넘고 대하 북쪽을 통해 타슈쿠르칸을 넘은 혜초는 안서사진과 돈황을 거쳐 장안으로 귀환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여행한 각국의 종교ㆍ정치ㆍ경제ㆍ풍속을 기록한 것이 실크로드에 관한 최고의 여행기 중 하나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다. 말년에는 산서성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780년경 그곳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첫날 오후 대안탑 방문에 앞서 혜초가 머물렀던 대흥선사를 찾았으나, 청나라 때 새로 지어진 그곳에는 혜초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다.

 

혜초가 실크로드를 누비던 시절 당은 토번이라는 막강한 적 때문에 실크로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과 비슷한 시기에 티베트 고원의 강자로 떠오른 토번은 점차 세력을 키워 타림 분지 일대에서 당의 세력을 잠식해 들어갔다. 혜초가 활동하던 8세기 들어서는 서쪽의 이슬람 세력과 연대해 오히려 당을 압도하는 국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토번을 누르고 실크로드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는 데 앞장선 당의 장군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高仙芝)였다.

 

고선지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하서(지금의 무위)로 끌려온 고사계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그곳으로 끌려왔을 때 고선지는 이미 실크로드의 정복자가 될 운명을 부여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선지가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있을 무렵 타림 분지 일대에 당의 패권을 위협하는 격변이 일어났다. 토번 옆에 있는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파키스탄 길기트) 국왕이 토번으로 불려가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이함과 동시에 토번 서북의 20여 나라가 토번에 굴복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당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로 그동안 바쳐 오던 조공을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747년 현종은 특별히 칙서를 내려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삼아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번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고선지는 전쟁사에 길이 남을 대담무쌍한 행군을 단행한다. 안서도호부가 있는 쿠차와 안서사진의 하나인 소륵을 떠난 고선지군은 토번의 중앙아시아 전진 기지가 있던 연운보(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랑가)를 점령했다. 그리고 해발 4688미터에 이르는 탄구령(坦駒嶺, 지금의 힌두쿠시 산맥 다콧 고개)을 넘어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파키스탄 길기트)을 정복했다. 그러자 불름(拂菻, 오늘날 다마스쿠스)을 비롯한 서역의 72개국이 당에 복속해 왔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 산맥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탄구령을 넘은 고선지의 활약은 때때로 한국인에게도 자부심의 근거로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선지가 이끈 당의 승리에 한국인이 열광하는 것이 타당할지, 또 당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을 응징한 이 싸움을 정당화하는 것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현종은 연운보를 함락하고 개선한 고선지를 그해 12월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했다. 사실상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등극한 고선지는 이 지역에 대한 당의 패권을 지키기는 쉽지 않은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토번과의 대결에서는 일단 우위를 점했지만 서쪽에서 세력을 뻗어 오는 대식(大食), 곧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당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이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를 믿고 뻣뻣한 태도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750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이 대식과 연합해 당에 대한 조공을 거부했다.또 카자흐스탄 알마티 일대에 있던 돌기시(突騎施)도 아홉 나라와 더불어 당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고선지는 곧바로 응징에 나서 그해 12월 키르기스스탄 대평원을 가로질러 이 나라들을 정벌하고, 걸사국 왕 발특몰(勃特沒)과 석국 왕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개선했다.

   

이듬해 석국 등은 아바스 왕조와 연합군을 구성해 고선지를 공격해 왔다. 고선지는 오늘날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경계를 흐르는 탈라스 강에서 이들에 맞섰다. 중국 왕조와 이슬람 제국의 첫 번째 맞대결이었던 이 싸움에서 고선지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패배는 동서 문화 교류사에 의도치 않은 두 가지 기여를 했다. 하나는 고선지가 데리고 있던 제지 기술자들이 대거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혀 가 서양에 제지술을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7세기 중엽부터 해안 지방으로 들어오던 이슬람교가 탈라스 강 전투를 계기로 중앙아시아를 통해서도 중국에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중국은 서역에 물질문명을 전하고 서역은 중국에 정신문명을 전하는 기존의 패턴과 동일하다.

 

고선지는 비록 패장이었지만 그동안 세운 전공이 워낙 커서 별다른 문책을 받지 않았다. 정작 그의 운명을 거꾸러뜨린 것은 내부의 적이었다. 탈라스 강 전투 후 4년 만에 당 역사상 미증유의 반란인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현종이 양귀비와 사랑을 나누느라 국정에 소홀한 사이에 일어난 이 반란은 당나라를 결정적으로 쇠퇴케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선지의 목숨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당시 하서절도사로 있던 고선지는 부원수로 임명되어 반군에 맞섰다. 무서운 기세로 반군이 진격해 오자 고선지는 태원창(太原倉)이 반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수 물자를 군사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불사른 뒤 동관(潼關)이란 곳으로 퇴각했다. 그런데 고선지와 늘 함께 했던 환관 변령성(邊令誠)이 그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고선지가 군량을 탈취하고 퇴각했다는 거짓 보고를 현종에게 올린 것이다. 고선지는 100명의 칼잡이를 들고 그를 맞이한 변령성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안녹산의 난은 양귀비의 죽음과 현종의 양위를 초래한 끝에 가까스로 진압되었지만, 이로써 당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이는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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