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실크로드 문화 답사(10)]

“자살 테러가 목적이었다면 어머니와 아내를 함께 차에 태우지는 않았겠죠. 테러가 아니라 개인적인 억울한 사정을 알리기 위한 집단 분신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8일 발생한 중국 천안문 차량 폭발 사건은 위구르족의 테러라는 중국 당국 발표가 있자 이리하무 토흐티 교수(중국민족대학 경제학과)는 독일의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정부가 위구르족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 대해 정황을 따지지 않고 테러로 규정해 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 위구르족의 종교, 문화의 자유를 보장하고, 위구르인들을 존중하고 문화적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겨레 테마여행, 실크로드 문화 답사(8)]에서 흉노 우현왕의 투항으로 하서주랑의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을 통째로 얻었다는 거 기억하시죠? 한은 서역으로 가는 길목이자 전략요충지를 얻었으니 재빨리 울타리를 쳤습니다. 군사도시 ‘하서사군’을 설치해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농민, 상인, 지주, 노동자도 이주시켰습니다.

‘하서주랑’을 얻고 나니 서역의 위구르족이 지배하는 오아시스 국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과 흉노는 이곳을 서로 먹겠다고 50여 년간의 싸움을 이어갔고 결국 깃발 꽂은 승자는 한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배하기 위해 서역도호부를 설치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60년이었습니다.

위구르는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계 민족으로 돌궐, 흉노의 후예입니다. 744년 위구르 제국을 세웠고, 840년 멸망한 뒤에도 실크로드 주요 경로인 간쑤, 둔황, 투르판 등지에 위구르 왕국을 세워 동서의 문화와 유목+농경문화를 융합한 수준 높은 문화를 가졌습니다. 지금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총인구는 약 2200만 명, 이 가운데 위구르인은 약 920만 명입니다.

이 지역은 당나라 때 중국 영토가 되었다가 명나라 때 힘이 안 닿아 포기했고 다시 원,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중국이 들어서고 1955년 중국의 다섯 개 소수민족 자치구 중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

위구르지역의 중국 동화(同化) 정책은 1962년 란저우-우루무치를 연결하는 철도가 뚫리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수많은 한족들이 기차를 타고 새로운 기회의 땅 신장으로 향했습니다. 실제로 7%(1949년)에 불과했던 신장의 한족 비율이 30여 년만에 40%(1982년)를 넘었습니다. 이에 반해 위구르족은 74%(1955)에서 46%(1982)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이주를 통해 기대했던 동화나 민족 융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아직도 고유어를 쓰고 이민족과 통혼(通婚)을 기피하고 거주지역도 따로따로입니다.

‘무슬림’이란 편견으로 기업과 상점에선 위구르족을 기피하고 말 잘 통하는 한족을 선호하며 석유와 천연가스, 각종 개발사업 등 부를 가져다주는 사업은 거의 한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차별과 소외로 소수민족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난주-우루무치 고속철이 오는 2014년 완공될 예정이랍니다. 장건이 몇 개월을 걸려 간 곳을 8시간 만에 주파해 중국 서부 지역의 경제발전과 인적교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게 당국의 설명입니다. 2006년 청해성-서장자치구(티베트) 라싸를 연결하는 고속철도인 청장선이 개통된 후 폐쇄적이던 티베트를 한족색채로 물들인 효과를 신장에서도 볼 거라는 기대입니다.

이른 아침 짐을 꾸려 호텔을 나와 하서주랑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지만 찬란한 동서문화의 흔적을 따라간다는 기대와 설렘에 앞서 2000년 이상 침략과 억압, 약탈로 고통 받은 소수민족들의 눈물과 상처가 아직 진행중인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이 여행기는 이동구 팀장이 주주, 독자와 함께 한겨레 테마여행 <실크로드 문화답사>를 다녀온 후 지난 해 9월부터 페이스북과 개인 블로그에 실었던 글입니다.)

 

한겨레:온  hanion@hani.co.kr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