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성숙의 '한겨레와 나': 어린시절-장단(長端), 그 아름다운 풍광

한겨레:온l승인2016.03.17l수정2016.03.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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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한겨레> 창간 발기인이자 논설위원을 지낸 조성숙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지난달 19일 향년 81세에 별세했다. 그는 193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65년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활동하였다. 75년 동아일보사 기자·피디들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나서 해직된 뒤 2002년에는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아 복직투쟁을 이끌었다.

▲ 한겨레 자료사진: 고 조성숙 전 한겨레 논설위원

88년 5월 ‘한겨레’ 창간 뒤 논설위원, 기획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피해 대책’ 등 여성문제 여론화에 앞장섰다. 한림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가족치료 연구과정을 수료한 뒤 ‘조성숙가정폭력상담소’를 열어 여성 인권 보호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한국가족문화원 이사 겸 부원장, 강남가족상담센터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그가 쓴 책은 <어머니라는 이데올로기-어머니의 경험세계와 자아찾기>(한울·2002년), <여자로 산다는 것>(2012·한울) 등이 있다. 2008년부터 신장 투석 등 투병생활을 해온 고인은 2014년 자전에세이 <한겨레와 나>를 정리해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다. 그 책에 실린 글을 여기서 연재한다.

 

어린시절-장단(長端), 그 아름다운 풍광

나는 1935년 음력 3월 5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259번지이다. 이 주소는 커서 학교에 다니면서 줄창 서류에 기재하던 사항이라 내 머리에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어떤 환경이었는지도 전혀 모르면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본적지였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나의 본적은 남편의 본적지로 바뀌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1가 4번지. 나는 결혼 후 이 본적지를 익히느라 애를 먹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내가 살았던 곳이 궁금하여 찾아갔으나 어려서 자라던 고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나마 번지수는 그대로 세류동 259번지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어 황망하였다. 다만 내가 다니던 세류 초등학교는 잘 보존되어 있어서 반가웠다.

내가 네댓 살 때 살던 곳은 개성 근방의 장단(長端)이라는 소도시였다. 장단은 소설가 박완서 씨가 자란 곳으로, 큰 개울가에 ‘싱아’라는 키 큰 풀이 자라 그것을 꺾어 먹으면 맛이 있었다. 동네 언니들을 따라다니며 꺾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박완서 씨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그런 묘사가 나온다. 그때 아버지는 도시 한가운데 넓은 창고와 일본식 관사를 갖춘 어느 사무실에 다녔다. 우리 가족은 그 주인아주머니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후덕하게 생기고 인품 좋은 주인아주머니와 우리 가족이 가깝게 지냈던 일이 생각난다. 그 아주머니는 애를 못 낳아서 우리 자매를 퍽 귀여워했고 가면 번번이 맛있는 것을 주시곤 해서 더 잊을 수가 없다.

그 도시는 우리 또래 애들이 놀러 다니기 좋았다. 동네 북쪽을 흐르는 강으로 빨래하러 가는 엄마를 따라가 물놀이도 하고, 동네 기생들이 강가로 나와 미루나무 나뭇가지에 높게 매놓은 그네를 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간혹 그네가 꺾여서 부러지면 그네 타던 아가씨들은 강물에 빠지기도 하였다. 동네 땅꾼이 뱀의 꼬리를 잘라 움에 묻던 광경도 기억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 구경하곤 했다.

어느 해 여름, 큰 장마가 져서 개울의 징검다리가 떠내려가 물이 마을로 범람하였다. 서울로 가는 큰길이 막혔다며 사람들이 개천가로 나와서 물 구경을 하였다. 나도 아버지 손에 이끌려 나와 물 구경을 하였다. 물의 힘이 드세서 큰 집채만 한 돌이 떠내려갔다.

겨울이 되자 어머니가 일본산 귤을 박스로 들여놓아서 실컷 먹었다. 그 무렵 독감이 유행하여 어머니는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을 창호지 문에 붙이고 바깥 동정을 살펴볼 뿐 바깥출입을 엄단했다. 우리는 콧물을 질질 흘리며 방 안에 갇혀 생활했다. 감기는 쉽게 낫지 않았다. 유리조각을 통해 바깥을 살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전인지 후인지 우리 자매는 교회에 선발되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그 어린 주 예수' 하는 노래에 맞춰 유희를 하였다. (다음회에 계속)

편집 : 김종태 편집 담당, 김미경 부에디터, 이동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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