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골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창의문은 북소문에 해당하는 문이지만, 북소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른다. 속설에는 이 부근 골짜기에 자욱한 안개가 자주 끼어 이 일대를 자하동(紫霞洞)이라고 불렀고, 자하문도 동네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능선의 가장 낮은 부분에 있는 문이다. 그 문에서 세검정 골짜기에 노을이 지면 비봉이며 사모바위며 보현봉 등 북한산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뿌연 안개 위에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기에 자하골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 최규식 경무관 동상

옛날 자하골에는 세검정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조선의 한지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다. 조지서는 태종 15년(1415) 조지소(造紙所)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세조 11년(1465)에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실록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버리기 위해 사초나 초고들을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씻는 세초(洗草)작업을 했다. 세초 후 먹으로 쓴 글씨를 없애고 재생된 종이는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로 보냈다. 세초는 세검정의 차일암(遮日巖)에 차일을 치고 했는데, 세초가 끝난 다음에는 그곳에서 세초연(洗草宴)을 베풀었다.

현재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있는 터에는 신라 때 지은 장의사(藏義寺)라는 사찰이 고려를 지나 조선 중기까지 영화를 누리며 내려왔는데, 연산군 때 불교의 탄압으로 쇠락하여 소멸했다. 그 후 숙종 38년(1712)에는 군사훈련소인 연무대가 세워졌고, 영조 23년(1747)에는 총융청이 설치되었던 자리였는데, 1886년 이후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옛날 이 자하골에는 봄철에는 앵두, 살구, 복숭아, 자두 밭이 있어 도성 사람들의 미각을 자극하였고, 가을에는 능금밭과 감나무 밭이 있어 그곳은 과일 먹으러가는 동네가 되었다.

▲ 1930년대 창의문밖 풍경을 노래한 백석의 '창의문외'(무우밭, 흰나비, 밤나무, 머루, 능금나무(林檎)등이 나온다)

창의문이 있는 동네는 조선시대 장의동(藏義洞)이었으므로 장의문(藏義門)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조선후기로 오면서 쓰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감출 장(藏)’을 쓴 장의문은 명종 1년(1545) 9월 7일 기사가 마지막으로 나오고, 선조 30년(1597) 5월 27일 기사에는 ‘풀 성할 장(莊)’으로 장의문 이름이 기록된 것을 끝으로 장의문이란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창의문은 의를 드러내는 문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1623년 3월 13일 광해군을 왕위에서 축출하기 위해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군들이 이 문을 통하여 궁궐에 진입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검정(洗劍亭)’ 또한 이 때 반정군들이 칼을 갈고 씻었다는 사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창의문

지금의 창의문은 태조 5년(1396)에 지은 창의문이 아니다. 영조 16년(1740) 8월 1일 당시 훈련도감의 대장이었던 구성임(具聖任)이 인조반정의 뜻을 기리고자 창의문을 보수하고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이라고 건의하여 영조의 명에 따라 다음 해(1741) 보수한 문이다. 4소문 중에서는 27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문이다.

▲ 창의문(러일전쟁 종군기자 잭런던이 1904년경 찍은 사진)

문루가 완공되고 2년이 지난 영조 19년 5월 7일, 영조는 세검정 일대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 창의문에서 인조반정을 되새기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의 명단을 현판에 새겨 문루에 걸어놓게 하였다. 정사공신이란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계해정사공신(癸亥靖社功臣)을 말하는데, 이때 1등 공신이었지만, 대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이괄은 명단에서 빠져있다. 그를 제외한 1등 공신부터 3등 공신까지의 명단에는 52명이 들어있다.

창의문 홍예 중앙에는 봉황 조각이 새겨져있고, 천정 안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창의문 밖 계곡에는 지네가 많았다고 한다. 지네의 천적은 닭이어서 지네를 잡기 위해서는 닭을 부려야했다. 그러나 도성의 성문에 닭을 그릴 수는 없어서 닭 모습을 닮은 봉황을 그렸다. 봉황이란 ‘수컷 봉(鳳)’과 ‘암컷 황(凰)’의 합성어여서 천정의 그림 또한 수컷인 봉은 부리를 붉은 색으로, 암컷인 황은 부리를 푸른색으로 그렸다.

▲ 창의문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창의문도 조선시대 내내 출입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문이다. 태종 13년(1413) 6월 19일 실록에는 풍수지리가인 최양선이 등장하여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좌우 팔에 해당하므로 길을 열지 말고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태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창의문이 있는 장의동 일대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령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태종 16년 7월 22일 기사에 창의문이 폐쇄되어 쌀을 운반하거나 문을 통행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창의문은 통행할 수 없는 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6년 후 세종 4년에는 도성수축을 위하여 문을 일시 개방한 적이 있었고, 세종 28년(1446) 4월 15일의 기록에도, 성문 통행이 자유로우니 명령을 받고 출입하는 사람 이외에는 창의문을 항상 닫아두라고 명령했던 것으로 보아 그 후로도 성문의 개방과 폐쇄가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문종 2년 3월 3일 풍수지리가 문맹검이 문을 닫도록 건의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지, 예종 1년에 다시 병조에 명하여 강력한 폐문지시를 내렸다. 중종 1년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이 똑같은 폐문 건의를 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몽진 갔다 환궁한 후 북한산성 축성론이 나오면서 출입조치를 해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사정이 되었다. 북한산을 가려면 창의문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9년(1617) 3월 17일에는 선수도감(繕修都監 : 국가의 건축도감을 관장했던 영건도감의 옛 이름)이 궁궐의 담장공사에 필요한 돌을 운반하기 위하여 창의문을 열도록 건의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중기까지도 계속되다가 그 이후 창의문 출입금지는 해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창의문 문루는 언제 건립되었을까? 영조 17년(1741)에 문루를 세웠다는 기록은 확실하지만, 그 이전에는 문루가 없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임진왜란 때 창의문의 문루가 불탔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문루’라는 옛 안내판의 설명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을 기리는 의미에서 창의문의 문루를 설치했다는 설이 믿음직할 뿐이다.

글 :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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