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소비자주권행동 수도권본부·반민족언론처벌입법추진TF 결성식

지난 21일 경기도의회에서 언론소비자주권행동(이하 언소주) 수도권본부 결성식 및 반민족언론처벌입법추진 TF결성식을 열었다. 

언소주의 수도권본부 공동 본부장 이원영 교수(수원대)는 “2011년 까지 4대강 운하건설 반대 운동을 하다보니까, 토건을 파괴하는 현장의 원흉에는 공정하지 못한 언론이 있었다. 객관적 보도만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강점기때의 민족반역언론에 대한 청산이 없던 역사가 우리의 정기를 갉아먹고 있다”며 발족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진 한홍구 교수의 초청 강연. 한때 민족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조선일보를 만든 주역들의 사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한기악(한홍구 교수의 친할아버지)은 위에서 두번째 줄 오른쪽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진 한홍구 교수의 초청 강연. 한때 민족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조선일보를 만든 주역들의 사진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한기악(한홍구 교수의 친할아버지)은 위에서 두번째 줄 오른쪽

이어 한홍구 교수(성공회대)의 초청 강연을 통해 조선일보에 대한 역사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3·1운동 바로 다음 해 1920년에 창간하였다. 사망자 7,900명으로 추산되는 국민들의 성과물로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친일단체 대정실업친목회 핵심 인사들을 앞세워 조선총독부의 발행허가를 받았다. 태생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 중후반 잠깐 괜찮은 상태였던 신문

하지만 1924년 독립운동을 하던 신석우가 인수를 하면서 조선일보는 민족지로서 자존심을 되찾을 뻔 하였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낸 한기악(한홍구의 친할아버지) 집에 기자들이 밥을 외상으로 먹고 갚지 못해 이문 설농탕 식당 주인이 직접 집으로 찾아와 드러눕기도 했다고 한다. 

호시탐탐 조선일보를 노리던 일제는 1932년 3월3일, 1919년 이후 9번에 걸쳐서 조선총독부에 체포되어 7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던 안재홍 사장을 만주동포에 대한 의연금 중 일부를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의 경비로 사용했다는 혐의로 구속해버렸다. 이후 조선일보는 광산으로 떼돈을 번 방응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 친일행위에 가담

1936년 8월 조선일보가 급 성장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조선중앙일보가 휴간을 하게 된 것이다.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의 위기를 사업 확장의 기회로 활용했고, 본격 친일 행위에 나섰다. 수차례 강연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왜곡·미화했고, 글로 남겼다. 친일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백범 김구의 남북협상 지지를 하는 보도와 후원을 하기도 했고, 만해 한용운의 글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국가보안법을 배격하는 글을 1면에 싣기도 하였다. 

방씨 일가 가계도이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용훈의 사망 후 그의 장남 방성오(34)가 코리아나 호텔의 대표가 됐다.ⓒ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 블로그
방씨 일가 가계도이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용훈의 사망 후 그의 장남 방성오(34)가 코리아나 호텔의 대표가 됐다.ⓒ 오주르디 ‘사람과 세상 사이’ 블로그

“지난 70년 동안 조선일보가 얼마나 오른쪽으로 왔는가.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 방응모의 반에, 반에, 반만 해도 조선일보가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홍구 교수는 목청을 높였다.

기생의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 준 ‘밤의 대통령’

방일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까운 술동무로서 박정희는그에 대해 ‘기생의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 준 사람’이라며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방우영 또한 밤의 또 다른 대통령이었다. 방우영은 박정희 독재 권력에 저항하던 젊은 기자들을 파면하고, 유신독재가 끝나는 순간까지 박정희를 찬양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결성한 집권기구 국보위에 입법위원으로 참여했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보도를 통해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해방 이후 군사독재정권 시기 정권의 하수 노릇을 했던 조선일보를 이끈 두 형제. 둘의 자식들이 운영하는 지금의 조선일보는 어떨까?

현재 조선일보 사장을 하고 있는 방일영의 첫째 아들 방상훈을 2006년 대법원은 조세포탈 및 회삿돈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억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한홍구 교수는 조선일보의 또 다른 흑역사로 코리아나호텔 건설을 언급하였다.

탈세, 성접대, 정경 유착관계의 중심에 선 방 씨 일가

코리아나 호텔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최고의 외화벌이로 꼽은 기생관광을 하러 온 일본인들로 북적거렸다. 방일영의 둘째 아들 故방용훈 코리아나 호텔 사장이 2009년 3월7일 목숨을 끊은 배우 장자연 씨가 숨지기 일주일 전에 남긴, 술접대와 성접대 등을 강요받았다는 문건(이하 ‘장자연 문건’)과 관련하여 검찰에 조사받기도 하였다. (2009년 8월 검찰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을 기소하였고, 2018년 12월 방용훈과 방정오 전 TV조선 대표를 각각 조사했다. 방용훈 씨는 폐암으로 2021년 2월 18일 69세로 사망)

그 외에도 2016년 9월 방용훈의 부인 이미란 씨가 한강 다리에서 투신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가정불화와 더불어 학대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방용훈 대표가 살아생전 이미란 씨에게 보낸 500만달러의 출처에 대해 소송중인 김영수 씨 (故이미란 씨 형부)는 ‘서울의 소리’에서 일본인 여성 이름 등 몇 사람 이름으로 서너차례 나뉘어 캐나다에 있는 자신의 처와 장모 등의 몇 개 계좌로 들어왔고, 그런 다음 70개 안팎의 계좌로 쪼개져 들어왔다며 캐다나 사법당국에서 돈의 흐름을 명백히 밝힐 거라고 했다. 그 외에도 방용훈의 장남인 방성오 코리아나호텔 대표(34)의 뺑소니 사건을 무마해주고, 방성오와 같이 도끼를 들고 자신의 집에 주거침입을 했던 방용훈에 대해 처벌은커녕 집사 수준으로 응대하는 용산경찰서에 대한 질타도 있었다.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수도권본부 결성식.  민족반역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는 범죄. -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한 유일한 나라. 언론의 처벌을 위한 입법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수도권본부 결성식.  민족반역범죄는 공소시효가 없는 범죄. -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지만 실행에 이르지 못한 유일한 나라. 언론의 처벌을 위한 입법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언소주의 수도권본부 공동 본부장 이원영 교수는 “조선일보는 마치 자신의 목을 쳐 달라고 기다리는 상태인 것 같다. 낙관적 시나리오를 예상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언론과 검찰개혁에 대해 정치인들은 겁이 나서 하지 못한다. 우리처럼 이름 없는 강성 시민들이 싸우기 좋다. SNS라는 무기도 활용해야한다”며 힘주어 말했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이향림 기타 필진  dlgidfla2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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