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욕관 - 명과 실크로드

3. 가욕관 - 명과 실크로드

 

▲ 주천 가욕관

장액에서 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정도 달리면 감숙성 서북쪽의 거점 도시 주천이 나온다. 원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장액은 감주(甘州)라 하고 주천을 숙주(肅州)라 했는데, 감숙성(甘肅省)은 바로 이 두 지명에서 첫 글자를 따 합친 것이다.

주천(酒泉)이란 지명에는 하서주랑을 한나라 영토로 만든 곽거병의 고사가 깃들어 있다. 곽거병이 흉노를 물리친 뒤 무제가 내린 술을 병사들과 나누려 하니 모자랐다. 그러자 곽거병은 이 술을 주천에 있는 샘에 부었는데 그곳에서 향기와 함께 술이 솟았다고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전설에서 술이 솟는 샘이라는 뜻의 주천이 유래한 것이다. 지금 주천에는 그 전설의 샘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날 칠채산을 위해 일정을 변경하면서 주천 시내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상태였다. 주천이 돈황까지 산하에 두고 있는 큰 도시임에는 틀림없지만 전설을 알려주는 공원 외에 뚜렷한 유적지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는 바로 주천에서 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가욕관(嘉峪關)으로 직행했다. 그곳은 명나라 때 서북 영토의 끝이었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이루는 요새로, 만리장성 중에서도 가장 장관을 이룬다고 해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으로 불린다.

가욕관 주변에는 오늘날 가욕관시라는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가욕관시 중심에서 서쪽으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가욕관은 협곡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 풍광이 볼만하다. ‘가욕’이란 이름 자체가 ‘아름다운 골짜기’를 뜻한다. 가욕관 성벽은 1372년(명 홍무 5)부터 황토를 판축하는 방식으로 쌓았다. 산등성이 위에서 사막과 고비를 가로 지르고 있는데, 산등성이가 45도로 가파르게 기울어 있어 멀리서 보면 장성이 산에서 땅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가욕관 내 주요 건축은 가욕관 군사를 관장하는 유격장군부(游击将军府), 관우 사당인 관제묘(关帝庙), 군사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펼치던 희대(戏台), 그리고 제사 장소이자 교육 기관인 문창각(文昌阁) 등이 있다.

가욕관이 명나라 때 만리장성 끝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명나라는 한당에 비해 축소 지향 왕조였다. 타림 분지 주변인 서역은 물론 그 관문인 돈황조차 포기하고 북쪽 몽골을 경계하는 데 골몰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안보를 위협한 외부 세력을 흔히 ‘북로남왜(北虜南倭)’라 한다. 북쪽으로는 몽골족, 남쪽으로는 왜구가 심심치 않게 쳐들어와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은 15세기 정화의 대원정 이후로는 해안을 걸어 잠그고 장성 안에 웅크린 채 외침을 예방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돈황과 신강이 다시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명 대신 중원의 주인이 된 청이 대대적인 정복 사업을 펼쳤기 때문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전성기에 청은 영토를 가욕관 서쪽으로 1000킬로미터나 더 넓혔다. 돈황은 물론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가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은 그때 일이다. 그뿐 아니라 동쪽 만주는 본래 여진의 고향이니 말할 것도 없고 옛 토번 영역인 청장고원 일대도 그때 중국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한 마디로 청나라가 없었다면 신강과 만주가 나비 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 현대 중국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청나라 들어 가욕관이 더 이상 최전선 역할을 하지 않게 되자 군인들이 철수하고 가욕관은 방치되어 황폐해졌다. 그런 가욕관이 지금처럼 활기를 찾게 된 것은 만리장성 서쪽 끝을 보고자 몰려오는 관광객 덕분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우리가 가욕관을 찾았을 때는 저 멀리 북경이나 천진에서까지 자가용을 몰고 온 가족 관광객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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