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고용노동부는 2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을 고쳐,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적응장애’와 ‘우울병’을 추가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감정노동자가 고객에게 폭언이나 폭력 등을 당해 우울병이 발생하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관련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715538.html

나도 감정노동자다. 나는 이 일을 2000년 7월경부터 하고 있다. 중간에 3년 6개월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잠시 떠난 기간을 빼고, 지금까지 12년 3개월 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제조공장과 수출부서만으로 조용하게 꾸려가던 회사가 한 번 방송을 타면서 제품구입을 문의하는 전화가 빗발쳐 급하게 조달된 상담요원이었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몰 관리부터 배송, 고객상담 관리까지 이 일 저 일 다 하지만 처음엔 고객 상담하는 일만 했다. 전화로 혹은 온라인 상에서 고객의 문의와 불만이 들어오면 응대하는 일이다. 상담경험도 많고 친절한 소질도 있는 편이라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3년 동안은 정말 전화가 많아서 근무시간 대부분 송수화기를 귀에 꽂고 살았다. 전화기 속 고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상당한 집중이 요구되는 일이고, 순간적인 말 한마디가 큰 일로 번지기도 하기에 스트레스는 좀 받았지만 그럭저럭 잘 수습해 나갔다. 다른 직원들이 응대하다 불질러놓은 고객도 잘 꺼준다고 해서 직원들이 ‘소방수’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상담경험이니 친절한 소질이니 이런 말은 다 장식이다. 사실 나의 상담비결은 단순하다. 바로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불만이 있는 고객에게 한 10번 이상 ‘죄송합니다’를 하면 대충 불은 꺼진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고객들은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기에, 나도 똑같이 ‘죄송합니다‘를 또 하고 또 하면 풀린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억울하지는 않다.

우리에게 잘못이 없는 경우는 좀 억울하다. 고객이 억지를 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송합니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대한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로 시작하고,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고객에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짜 죄송합니다’를 또 수 차례 말하면 대부분 해결된다. 몰상식하고 경우 없는 고객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네가 옳니 내가 옳니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고객을 놓치기 때문이다. 억울해하면서도 살살 달래야 한다.

어떤 날은 억울함을 넘어서 ‘한번 붙어봐?’ 그런 생각이 드는 고객도 있다. ‘죄송합니다’가 안 먹히는 고객이다. 이런 고객을 불만창조형 고객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한 답변에서 트집을 잡고, 다시 설명을 하면 또 그 말에서 트집을 잡는다. 진드기처럼 전화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새로운 불만을 계속 창출해내는 고객이다. 이런 고객들은 ‘죄송합니다.’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죄송하면 다냐’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말로 해결이 잘 안 된다. 결국은 뭔가 보상을 요구하는 고객이다.

내가 10여 년 전 경험한 한 고객의 예를 들어보겠다.

이 고객은 처음부터 우리 직원들에게 밉상으로 보였는데 이유는 이렇다. 핸드폰 전화번호를 불러주고는 “이리 전화하세요” 하고 탁 끊었다. 어~ 뭐지? 하고 당황한 직원은 '고객은 왕'이니까 시키는대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하자 고객은 불만을 이야기 하면서 집으로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한 직원이 그 집을 방문했는데 일이 더 커져버렸다. 싸움을 하고 나온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서 그 고객이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초등학생 꾸짖듯이 훈계조이며, 너무나 오만하여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소방수’가 처리하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했다.

나도 고객에게 2시간 가량 같은 말 설교를 들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자신이 진짜 옳은 줄 알고 더 기세 등등해질 것 같아서 그저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자세로 ‘네~~ 네~~’로 일관했다. 1시간 정도 지나자 인내심에 한계가 와서 이판사판 해볼까, 하는 생각이 꾸룩꾸룩 올라왔다. 그러나 잘못하면 육탄전까지 불사하고 경찰까지 부를 수도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참았다. 제 성질에 제가 쓰러질 수도 있는 사람이기에 '아픈 사람' 상대한다 생각하고 참았다. 또 거기까지 시간 내어 간 내 수고가 아까워서도 참았다. 마지막에 웃으면서 인사하고 나왔는데 그 가족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는 20살 정도 된 딸 하나가 있었는데, 엄마와 소 닭 보듯 말도 안하고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 말 안해도 서로 무시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버릇 어디 가겠는가? 처음 보는 나에게도 이러하니 가족에게도 아주 주리를 틀겠지...

그 고객과 지친 상담을 하고 나오면서 ‘이 고객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 그리고 버린다’로 결정하고 밀어붙였다. 그 전에는 한 고객이라도 놓칠까 아등바등 했었는데 버리는 고객도 있어야, 정말 우울병 안 걸리고 장사 오래 해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료직원과 관계에서도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은 버렸으면 딱 좋겠는데 자꾸 버리지 말고 대하라고 하면, 또 다른 사람이 버리지 않고 살려놓으면 직원들 간에 불편함이 생기고 그만 일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그 후로도 몇 명의 고객을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네. 맘대로 하세요’로 끝내버렸다. 고객들은 화가 나서 소비자보호원에 고발한다고 펄펄 뛰고, 책임자 바꾸라고 난리를 피웠지만 우리는 상대해주지 않았다. 게시판에 글을 잔뜩 올리면 어쩌나 했는데 IP 차단을 안했는데도 그냥 넘어갔다. 다 같이 안 받아주니까 고객들도 생각보다 쉽게 수그러들었다.

얼마 전에도 난 또 한명의 고객을 버렸다. 72세라 하시는 불만창조형 할머니였다.  일요일 아침 8시부터 계속 불만 전화 받는게 너무 피곤해서 “맘대로 하세요” 해버렸다. SNS에 올려 협박하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SNS에 올리겠다고 하셨다. 나는 한술 더 떠서 소비자보호원에도 고발하시라고 했다. 72세라 하여 그냥 살살 ‘죄송합니다’로 달래볼까 생각도 했는데 ‘다 먹을라 하면 병 된다’는 것을 알기에 과감히 버렸다. 세상 어디서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적절히 배합해서 일해야 뭐든지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다. <한겨레:온>에서조차도....

그런데 우리와 같이 갑질 고객을 버리는 이런 회사도 있다. 도시락 카페 업체를 운영하는 스노우폭스코리아다

▲ 스노우폭스코리아 입간판 : “우리 직원한테 갑질하면 내보내겠습니다” 입간판 화제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5268.html)

“우리 직원이 고객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다면 직원을 내보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직원한테 무례한 행동을 하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

관련기사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15268.html

정말 저 말대로 운영한다면 직원들이 우울병에 걸리진 않을 거다. 즐겁게 일하면 산재신청도 줄어드니까. 결국 회사도 이득이다.

나는 이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 세상은 참 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일을 하기 전에 15년 동안 ‘고맙습니다’란 말을 듣고 일했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고 ‘고맙습니다’란 말을 듣는 직업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를 수없이 해야 했으니 얼마나 공평한가? 12년 동안 '죄송합니다' 했으니 앞으로 3년만 더 하면 ‘고맙습니다’를 받고 살면서 제 것인 양 한껏 올라갔던 교만함에 대한 보속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2, 3년 간 변화가 조금 생겼다. 요새는 ‘죄송합니다’란 소리를 드문드문 한다. 오히려 ‘고맙습니다’란 말을 종종 듣고 있으니 공평의 굴레로 순환이 시작된 것 같다. 그러니 ‘죄송합니다’란 말 하는 것, 너무 자존심 상한다 생각하지 마시라. 그만큼 ‘고맙습니다’로 되돌려받게 될 터이니...

편집 : 이미진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