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실크로드 문화 답사(27)]

작자 미상의 조각품 <밀로의 비너스>와 <사모트라케의 니케>,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나폴레옹 대관식>,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와 <마라의 죽음>,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연간 미술관 관람객 수 부동의 1위는 늘 파리 루브르박물관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934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1500년대부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루브르 궁에 수집해 놓았던 많은 미술품을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공개해 미술관으로 정식 오픈했습니다. 루브르는 그 이후 꾸준히 미술품들을 모아 지금은 약 3만 5천여 점을 전시중이고 소장품은 40만 점 가까이 됩니다.

돈황의 막고굴은 실크로드 최대의 박물관입니다. 명사산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에 걸쳐 조성된 석굴군입니다. 석굴은 중국 5호16국 시대 나라중 하나인 전진(前秦)때부터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여 북량, 북위, 서위, 서주, 수, 당, 송, 서하, 원나라 시대까지 계속 생겨났습니다. 석굴은 735개, 벽화는 모두 4만 5천 평방미터, 헐~ 32평 아파트 425개 넓이네요 ^^; 3000여 개의 소조품과 불교경서, 계약서, 악보, 의학서적, 여행기, 자수, 그릇 등 5만여 건.

▲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의 출사도가 그려진 돈황 막고굴 제 323굴 내부의 벽화. 원정에 앞서 장건이 무릎을 꿇고 한 무제의 배웅을 받고 있다.

사실 이 석굴은 목숨 걸고 서역을 오가며 장사를 한 무역상인들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장안에서 서역(중앙아시아, 중동, 터키 지역)을 오가며 거래를 했던 상인들이 중국의 마지막 주요 관문인 돈황을 떠나기에 앞서 무사히 거래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승려들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막고굴은 동서교통로 천 년의 바람(pray for)이 조성한 불교 사당입니다.

루브르가 500살이라면 막고굴은 1600살입니다. 루브르가 ‘왕’들의 미술관이라면 돈황의 막고굴은 승려와 카라반 등 민중들의 미술관입니다. 루브르가 ‘수집’으로 만들어졌다면 막고굴은 ‘참여’해 만들었습니다. 루브르가 권력의 표상이었다면 막고굴은 ‘삶’자체였습니다. 또한 루브르가 미술관이라면 막고굴은 종합역사예술관입니다.

예술품뿐만 아니라 1200년대의 수많은 책들도 발견되었습니다. 이 많은 책들 중 한국인 최초의 해외여행기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근데 그게 지금 어디로 갔나요?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 여행기는 이동구 팀장이 주주, 독자와 함께 한겨레 테마여행 <실크로드 문화답사>를 다녀온 후 지난 해 9월부터 페이스북과 개인 블로그에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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