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테마여행: 강응천과 실크로드를 가다(7-1)

돈황(敦煌) - 실크로드의 꽃 한겨레테마여행l승인2016.04.15l수정2016.04.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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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돈황(敦煌) - 실크로드의 꽃

가욕관을 떠난 우리는 하서주랑의 끝이자 진정한 실크로드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돈황으로 향했다. 900킬로미터에 이르는 하서주랑의 마지막 1/3 구간을 달리는 동안 북쪽으로는 그 옛날 몽골군이 부챗살처럼 뻗어 내려오던 고비사막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남쪽으로는 기련산맥 너머 그 악명 높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막을 바라보다 보면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말 그대로 신기루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도시의 풍경이 사막 위에 펼쳐지던 경험을 했는데, 이번에는 지평선을 따라 아스라이 강물이 보이는 것이다. 먼 옛날 사막의 여행자들에게 저 신기루는 얼마나 큰 희망고문이었을까?

아직 해가 좀 남아 있는 시간에 들어간 돈황은 여유로운 고도(古都)였다. 옛 이름인 ‘사주(沙州, 모래 마을)’가 주는 황량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시내 한가운데를 흐르는 당하(党河) 때문에 사막의 도시가 아니라 무슨 호반의 도시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것부터가 이채로웠다. 기련산에서 발원해 300킬로미터를 흘러가는 돈황 인민의 ‘어머니 강’ 당하야말로 돈황을 실크로드의 꽃으로 만들어 주는 오아시스 중의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었다.

천산남로와 두 관문

▲ 돈황의 양관의 고지

기원전 111년 한 무제는 하서사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설치하면서 그 외곽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이라는 두 관문을 만들었다. 5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남북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관문은 고대 실크로드의 핵심을 이루는 천산남로의 입구였다.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는 북아시아 스텝 지대를 오가는 초원의 길,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이루어진 오아시스 길, 남쪽의 바닷길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협의의 실크로드는 오아시스 길을 가리키고, 그중에서도 장건과 현장 등이 이용한 핵심 루트는 바로 돈황에서 연결되는 천산남로이다.

천산남로는 말 그대로 천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동서교역로이다.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다 보면 천산산맥 사이에 협곡이 나타나는데, 천산북로는 그곳에서 북쪽 우루무치 쪽으로 넘어감으로써 시작되는 길이다. 천산북로가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 사이에 난 하나의 길로 중앙아시아의 알마티, 비슈케크 등으로 이어지는 반면, 천산남로는 타클라마칸사막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길로 나뉜다. 이 가운데 타클라마칸사막 북쪽의 길을 서역북도라 하고 남쪽의 길을 서역남도라 하는데, 옥문관이 바로 서역북도의 관문이고 양관이 서역남도의 관문이다. 장건과 현장은 둘 다 서역으로 갈 때는 서역북도를 거치고 장안으로 돌아올 때는 서역남도를 거쳤다.

말이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지 실제로 옥문관과 양관에 가 보면 마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옥문관은 폐허가 되어 있고 양관은 옛 모습을 복원해 놓았지만, 어느 쪽이든 관문을 나서 서쪽으로 가려고 하면 우선 기가 질릴 수밖에 없다. 막막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어로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을 뜻하는 타클라마칸 사막은 40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는 타림 분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죽음의 땅이다. 한반도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땅이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고, 천산남로는 그 땅을 빙 둘러가며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들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처음 이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저 사막 너머에 오아시스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외나무다리로 갈래, 양관으로 갈래?”라는 질문을 들으면 서슴없이 ‘외나무다리’를 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양관을 떠나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간다는 뜻이었다. 양관 입구에는 말을 타고 한 손으로 힘차게 칼을 뻗는 장건의 상이 있고, 옛 양관 터 앞에는 당나라 때의 시인인 왕유(王維)의 상과 함께 그의 시비(詩碑)가 있다. 이 비에 새겨진 왕유의 시에는 양관으로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의 심정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 아침에 비 내려 가는 먼지 적시고,

客舍青青柳色新 객사에 푸르디푸른 버들은 더욱 새롭구나.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잔 드시게나. 

西出陽關無故人 서쪽으로 양관을 떠나면 친구도 없다네.

*위성(渭城)은 옛 장안 부근 함양의 현 이름.

 

막고굴(莫高窟) 이야기

▲ 돈황 막고굴

돈황이 실크로드의 꽃이라면 막고굴은 돈황의 꽃이다. 한 마디로 막고굴은 실크로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 전 노선을 돌아보더라도 막고굴을 보지 못했다면 실크로드를 보지 못한 것과 같고, 실크로드의 다른 지역은 가 보지 않더라도 막고굴만 봤으면 실크로드를 갔다 왔다고 해도 허튼 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막고굴을 지나칠 뻔했다. 중국 관광 당국의 바뀐 방침 때문이었다.

올 여름부터 중국은 막고굴 보호를 위해 하루 관람객을 6000명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관람객의 숨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소가 동굴 속의 벽화와 유물들을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굴마다 공기 측정기를 설치해 두고 위험 수위를 넘어선 굴은 일정 기간 폐쇄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1987년에 지정된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합당한 조치이다. 문제는 막고굴을 보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에게 얼마나 공평한 기회가 돌아가도록 할 수 있느냐였다.

당국은 매일 6000명분의 입장권을 당일 0시를 기해 인터넷에서 판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돈황 시내에 마련된 입장권 판매소에도 일부분을 배당해 두었다가 방문객에게 판매했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불을 켜고 기다렸다가 0시가 되자마자 해당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입장권이 바로 동나 있다는 데 있었다. 우리 여행사의 의뢰를 받은 현지 여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여행사나 개인이 표를 매점매석해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서 당국에서도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가욕관을 관람할 때부터 우리를 인솔하는 이 사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막고굴 입장권을 확보할 전망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최대한 수완을 발휘해 현지 여행사와 ‘꽌시(关系)’가 있는 막고굴 관리소 측으로부터 일단 아침 일찍 막고굴로 와 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돈황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버스에 올라 막고굴로 달렸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 입장권이 왔고 우리는 중국인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막고굴 관람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칠채산에 이은 또 한 번의 드라마였다.

사막 지대의 산에 수백 개의 석굴 사원이 뚫려 있는 막고굴은 굴마다 수많은 불상이 있기 때문에 천불동이라고도 불린다. 오호십육국 중 하나인 전진(前秦) 때부터 짓기 시작해 수, 당, 오대십국, 서하, 원 등의 왕조를 거치며 거대한 규모로 형성되었다. 735개에 이르는 석굴들 안에 총면적 4만 5000평방미터의 벽화와 2415존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막고굴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누린 소수의 승관(僧官),승려로서 그림을 그린 화승(畵僧),떠돌아다니다가 동굴 벽화를 그리며 동굴에 기거하게 된 화공이 그들이다.

이곳은 366년 승려 낙존(樂尊)이 산을 지나다가 홀연 수많은 부처가 현현하듯 황금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암벽에 굴을 파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법량선사(法良禅师) 등이 계속 굴을 파고 참선을 하면서 이곳을 ‘사막의 높은 곳’이라는 뜻에서 ‘막고굴(漠高窟)’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석굴 사원을 짓는 일보다 더 높은 수행은 없다는 뜻에서 오늘날과 같은 ‘막고굴(莫高窟)’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북위, 서위, 북주의 통치자는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석굴 조성도 왕공귀족의 지지를 받아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수당 때는 실크로드가 번영하면서 막고굴도 함께 번창했다. 특히 불교를 숭배했던 무측천 때는 동굴이 10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토번이 돈황을 장악한 뒤에도 막고굴에서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조성하는 일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송과 서하 이래로는 이전에 만들어진 것을 보수만 했지 적극적으로 새로운 굴을 만들고 불상을 만드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원나라 때에 이르러 동굴 조성이 중단되고 가욕관을 국경으로 삼은 명나라 때는 방치되다시피 되었다.

청나라 때인 1718년 강희제가 신강을 평정하고 1723년 옹정제가 돈황에 사주소(沙州所)를 설치했다. 그리고 1760년 건륭제 때 다시 돈황현(敦煌縣)으로 바뀌어 새로운 번영의 계기를 맞고 막고굴도 주의를 끌게 되었다. 오늘날 막고굴은 불교 예술품이 모여 있는 장소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꼽힌다. 또 산서성 대동의 운강석굴,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 감숙성 천수의 맥적산석굴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석굴로도 일컬어지고 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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