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을 바꾸다.

새로운 유치원

아들의 적응과 함께 우리도 개똥과 함께 살던 집에서 3개월 살고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지역은 이전과 다른 학군이었다. 어렵게 적응한 유치원을 옮기나 마느냐로 고민을 했으나 훨씬 가까운 거리에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아서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시켰다.

그 학교에는 아들과 동갑내기 친구 현이가 다니고 있었다. 현이 아빠는 남편과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동료였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 픽업서부터 살림살이 구입, 음식물 사는 것 등 모든 것을 도와준 현이네와 평소에도 늘 왕래하며 지내서, 현이와 아들도 자주 어울렸다. 전학수속을 밟을 때 학교에 찾아가서 이전 유치원에서의 초기 부적응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래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현이와 같은 반에 배정이 되었다. 아들은 전학 간 학교에서 어떠한 문제도 보이지 않았고 순탄하게 정착했다. 현이가 이모저모 많은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행복해보였고 자신감도 붙는 것 같았다.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면 ‘얘가 10개월 전의 그 아이인가’ 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느낌이 든다.

▲ 브롱스 유치원 졸업사진

학교에서는 잘 정착했는데 집에서는 어땠을까? 예전과 비슷했다. 여전히 혼자 중얼대며 노는 것을 좋아했고, 말도 없었고, 겁도 많았지만 엄마가 집에 있어서 그런지 눈물은 좀 줄어든 것 같았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들끼리 모인다고 남편의 직장에 함께 다니는 다섯 가정과 자주 어울렸는데 아들은 그 아이들과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잘 관찰해보면 아들은 여럿이 모이면 혼자 놀 때가 많았다. 2~3명 정도 있으면 아주 주도적으로 깔깔거리며 잘 놀았다. 그 중 현이네 집과 가장 가까워서 아이들은 거의 매일 서로 집을 번갈아 가며 놀았는데 현이 엄마가 두고두고 하던 말이 있다.

"욱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요. 30분 이상 혼자 창가에 서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뭐하나 궁금해서 가봤더니 레고로 만든 기차를 가지고 창문레일을 기차레일 삼아 중얼거리면 노는 거예요. 조용히 혼자서 어찌나 재미있게 잘 놀던지.... 우리 현이도 좀 그리 차분해봤으면... "

아들과 현이는 내성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지만 활동량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한 번 놀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놀았다. 저녁이 되어 헤어질 때면 늘 아쉬워하며 ‘내일 또’를 약속할 정도였다. 현이는 미국 출생으로 조기 유아교육을 탄탄히 받아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유창한 똘똘한 여자아이였다. 어린 나이인데도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내가 ‘비단결 현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운 마음씨를 가진 아이다. 내성적인 아이라서 수줍음이 많았지만, 활동량도 많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았다. 조신함을 강조하는 현이 엄마는 그런 현이를 구박했지만 나는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현이가 마냥 귀여웠다. 현이 엄마는 조용히 노는 아들을 가진 내가 부럽고, 나는 아들과 다른 현이를 가진 현이 엄마가 부럽고...

그렇게 잘 지내던 브롱스 생활 1년 만에 우리는 보스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남편의 보스가 보스턴의 한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남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남편은 1년 동안 매일 14시간 이상씩 쏟아 부은 연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아들이 또 적응해야한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남편이 하던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미국에서 세 번째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유치원 2

메사츄세츠주와 뉴욕주는 학년 기준 연령이 달랐다. 뉴욕주에 살았으면 1학년으로 들어갔을 텐데 보스턴에서 아들은 다시 Kindergarten(유치원)에 다녀야했다. 유치원에서는 알파벳도 교육시키지 않았다. 아쉬웠다.

보스턴에서의 1년 동안은 주변에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한국 아이들이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들은 학교생활이 편안한 것 같았다. 예전의 걱정하던 아들이 아니었다. 친구의 집에 초대도 받아 놀러 갔고, 친구에게 전화도 자주 왔다.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자주 전화가 왔다. 할로윈 가면파티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스스로 연출하고 드라큘라 복장을 하고 가서는,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간 딸과 공동 1등을 해서 상금 1달러도 받았다. 아들이 좋아하는 Science Museum에 가서 K-Nex도 실컷 만들어 보았다.

▲ 보스톤 유치원에서 할로윈 때 모습

미국에 온지 1년 6개월이 지나면서, 슬슬 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돌아가기 싫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딸은 우수학생으로 뽑혀 상도 받았고 아들도 신이 나서 학교를 다녔다. 남편에게 미국에서 살자고 졸랐다. 남편은 파면당한다고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남편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고 우리는 좀 더 있다 가겠다고 남았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저런 남는 방법도 궁리해 봤지만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남편의 귀국요청 전화에 포기하고 말았다.

귀국하면서 단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이 있었다. 아들은 1학년 2학기에 들어가야 했는데 한글을 다 익히지 못한 것이었다. 한글 공부 하자고 하면 아들은 질색을 하고 도망을 다녔다. ‘애구.. 발등에 불 떨어지면 하겠지’ 하는 태평스런 마음과, 저래 가지고 경쟁적인 한국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교차했다. 그래도 나는 미국에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래 까짓것 살아남겠지’ 라는 믿음으로 귀국을 하게 되었다.

99년 5월경인가? 뉴욕 친척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집에서 개를 키웠는데 약간 야생성이 있는 이상한 진돗개였다. 친척으로부터 최근에 사람을 한 번 문 적이 있어 묶어 놓았으니, 가까이 가지 말고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는데.. 아들이 공놀이를 하면서 공이 개 옆으로 가니까 순간적으로 개 가까이 가서 고개를 숙였다. 그 때 개가 아들 얼굴을 물었다. 눈 주위와 입 주위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아들을 붙잡고 911을 불러 타고 갔다. 응급요원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현장에는 없었고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어~어~” 하고 있을 때 아들이 얼른 또박또박 말했다. “It's just accident, it's just accident" 아들은 그 친척집 개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사고’라고 수차례 강조하면 말했던 것이다. 나보다 더 침착하게...

또 한 사건은 남편없이 <Raging Waters>란 어마어마하게 큰 물놀이 공원에 갔을 때였다. 튜브를 타고 물이 흐르는 수로에서 놀고 있었는데 딸이 코피가 났다. 화장실에 가서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아들에게도 가자고 하니, 아들이 어디 안가고 혼자 수로에서 계속 돌면서 놀고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딸의 코피가 쉽게 멎어지지 않아서 시간이 좀 걸렸다. 수로에 와 한참을 기다려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놀라서 여기저기 찾아다녔으나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미아보호소에 가 보았더니 아들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아주 침착한 태도로 혼자 와서 엄마를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다고 했다는 거다.

나중에 아들에게 들어보니 몇 번 수로를 돌고 왔는데도 엄마가 오지 않아서 갑자기 엄마가 나를 못 찾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그래서 지나가는 어떤 아줌마에게 미아보호소를 물어서 혼자 찾아가서 앉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랐다. 2년 만에 어떻게 그런 판단력이 생겼는지.. 여하튼 그렇게 성장했는데 믿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남편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삶을 꾸리게 되었다.

<계속>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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