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고굴과 명사산

막고굴의 주요 건물

막고굴의 735개 동굴 가운데 관람이 가능한 492개 동굴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관람객들은 안내자를 따라 매우 제한된 10여 개의 동굴만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굴 안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안내자는 관광객들에게 이어폰을 나눠 주고 무선 마이크로 소곤소곤 설명하고 길 안내를 한다.

우리 일행이 처음 들어간 굴은 323호였다. 그 안에는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하면서 무릎을 꿇고 무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벽화(장건출사도)가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그런 그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불상과 다른 그림만 보고 나왔는데, 다른 동굴들을 관람하면서 안내자에게 물어 보니 바로 그 굴에 장건의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해를 구해 다시 한 번 들어가서 겨우 해당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과 관련이 있는 동굴은 220호와 335호이다. 그곳에 새의 깃털을 장식으로 꽂은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 다른 외국 사신과 함께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동굴은 아마도 96호 굴일 것이다. 이 굴 안에는 35.5미터나 되는 대불이 앉아 있다. 서하 대불사의 와불보다 1미터가 더 크다. 무릎과 무릎 사이의 너비는 12미터이다. 무측천 시대인 695년에 영은(靈隐)선사와 음조(陰祖)거사가 건조한 것으로, 석벽에 바로 대불의 형상을 조각한 뒤 채색을 했다. 석가모니의 후계자이자 미래불인 미륵불을 형상화한 이 대불은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는 바람에 당나라 양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웅장한 모습만은 고금을 관통하고 있다. 워낙 대불이다 보니 굴 앞에 9층짜리 누각을 지어 이를 ‘구층루’라 부른다. 본래는 4층이던 것을 1935년 9층으로 개조했다. 처마가 삐쭉빼쭉한 것이 정감 있고 그 앞에 달아맨 풍경 소리가 고즈넉하다.

막고굴 안에서도 특히 유명한 장경동은 17호굴이다. 9세기 중반에 건립된 16호굴은 그 앞에 3층 목조 처마를 지어 ‘삼층루’로 불리는데, 1900년 도교의 도사인 왕원록(王圆簶)이 이 16호굴을 청소하면서 쌓인 모래를 치우다가 굴 북쪽에 연결되어 있는 장경동을 발견했다. 2.6미터 넓이에 3미터 높이의 굴방이었다. 당나라 말기에 마련된 장경동은 본래 홍변(洪辨)이라는 승려의 상을 안치한 작은 굴이었다. 11세기 초엽 전란 등으로 막고굴이 훼손 위기에 처하자 불경, 불화, 각종 법기(法器), 그 밖의 종교적 사회적 문서 5만여 건을 이곳에 숨기고 입구를 벽으로 막았다. 그렇게 막은 벽에는 벽화를 그려 놓았는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굴을 막았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혀 갔던 것이다.

장경동에서 나온 문서는 대부분 사본이고 일부가 각본(刻本)이다. 문서에 쓰인 글은 한문이 약 5/6를 점하고 고대 티베트문자, 산스크리트문자, 소그드문자, 위구르문자, 쿠차문자, 히브리문자 등도 있다. 서하문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서하 군대로부터 문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장경동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내용은 불경이 중심이지만 도교 경전, 유가 경전, 소설, 시부(詩賦), 역사, 지리, 회계 장부, 역법, 계약서, 편지 등 매우 다양하다. 이들 문서와 석굴 예술을 연구하는 돈황학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이다.

외국인이 먼저 알아본 장경동의 보물들

1907년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은 탐험대를 이끌고 신강에서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 친분이 있던 중국의 장경 장군이 그에게 돈황에서 나온 불경 한 권을 보내 주었다. 이 불경이 당나라 때 것임을 알아본 스타인은 바로 돈황으로 향했다. 여기서 그는 장경동을 보고 왕원록을 찾아가 도교 사원 짓는 것을 돕겠다고 해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왕원록의 허락을 받아 장경동에 들어가 자료들을 살펴본 뒤 24상자분의 사본과 5상자분의 예술품을 챙겼다. 그 대가는 종이 값에 불과한 은전 200냥이었다. 7년이 흐른 뒤 스타인은 다시 막고굴을 찾아 은전 500냥에 돈황 문서 570묶음을 빼돌렸다. 그는 이렇게 빼돌린 장물들을 대부분 대영박물관과 인도의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대영박물관은 돈황 관련 문화재만 1만 3700건을 소장하고 있는 돈황학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스타인의 다음 타자는 막고굴에서 고대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돈황으로 달려간 프랑스의 고전학자 펠리오였다. 그는 한문학에 식견이 풍부한 학자였기 때문에 3주 동안 장경동에 머무르며 문헌들을 상세히 조사했다. 그리하여 스타인이 통역에 의존하느라 소홀히 넘긴 진귀한 경전들과 언어학, 고고학상 매우 가치 있는 6000권의 사본, 화집 등을 10대의 큰 차에 가득 싣고 파리로 옮기게 했다. 돈황 문서가 가진 최고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고대 학설과 옛 사람의 주해(註解)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읽히는 『논어』는 하안(何晏)의 주석본 한 종뿐이다. 그런데 장경동에서는 6세기 유학자 황간(皇侃)의 주석본과 한, 위진 시기 『논어』의 요점을 수록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희귀한 자료들이 모두 펠리오의 손에 들어가 파리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펠리오가 그 많은 보물들을 빼내 가는 데 들인 돈은 은 600냥이었다.

1909년 펠리오는 북경에서 몇몇 학자들에게 돈황의 희귀본을 보여주었다. 깜짝 놀란 중국 학자들은 청 왕조의 학부상서에 즉각 장경동 문헌들을 북경에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청 조정은 감숙포정사 하언승(何彦升)에게 운송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하언승이 장경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왕원록이 일부 자료를 빼돌렸고, 운송 중에 사라진 것도 많았으며, 북경에 도착한 뒤 하언승과 그의 친구들이 빼돌리기도 했다. 1900년에 발견된 5만여 건의 희귀본들 가운데 경사도서관(京师图书馆)에 입고된 것은 8757건에 불과했다. 또 세간에 유출되었다가 일본에 팔려 나간 문서 중 일부는 남경국립중앙도서관에 돌아왔다.

왕원록은 빼돌린 사본 가운데 일부를 스타인에게 팔아 치우고 나머지 600여 권을 1911년과 1912년에 걸쳐 일본인 탐험가 요시카와 고이치로, 다치바나 즈이초에게 팔았다. 1914년 러시아 불교학자 올덴부르크는 이미 비어 버린 장경동을 뒤져 1만여 편린들을 수거해 러시아과학기술원 동방학연구소에 기증했다.

문서 외에 벽화와 불상도 큰 손실을 입었다. 당송 시기의 벽화는 오늘날 돈황에 남아 있지 않다. 러시아의 올덴부르크가 126호 굴의 벽화를 떼어낸 데 이어 1923년 막고굴을 찾은 하버드 대학교의 랜든 워너는 점착테이프를 이용해 벽화 전체나 벽화의 도상 26점을 떼어냈다. 또한 왕원록은 동굴 일부를 뚫느라 적지 않은 벽화를 훼손했다. 1922년에는 러시아의 백군이 들이닥쳐 굴 안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벽이 그을려 적잖은 벽화가 파손되기도 했다. 화가 장대천(張大千)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막고굴에서 벽화를 모사하던 중 일부 벽화가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외벽을 벗겨 안쪽의 벽화를 감상해 논란을 빚었다. 이처럼 벽화를 떼어낸 석굴은 108호, 454호 등이 있다.

명사산(鸣沙山) 이야기

▲ 돈황의 명사산

우리는 막고굴을 구경하고 난 뒤 양관으로 갔다가 비교적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에 양꼬치로 유명한 사주야시장을 방문해 맥주 파티를 벌였다. 돈황의 사주호텔은 이번 답사여행에서 우리 일행이 이틀 밤을 묵은 유일한 곳이었다.

주독을 풀 겨를도 없이 이튿날은 새벽 여섯 시부터 서둘러 버스에 올라야 했다. 돈황 시내에서 남쪽으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명사산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였다. 메르스의 여진 때문에 낙타를 타고 명사산을 오르는 낭만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막에서 일출을 감상한다는 것은 평생 한 번 하기 어려운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명사산이란 ‘우는 모래의 산’이라는 뜻이다. 사막이나 사구(沙丘) 중에는 기후의 영향으로 석영 위주의 가는 모래가 쌓였다가 바람이 불면 모래알들이 기류를 따라 움직이며 윙윙 소리를 내는 것이 있다. 이를 명사지(鸣沙地)라 한다. 돈황 명사산은 이미 3000여 년 전에 형성되어 한나라 때부터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위진 시대에 나온 『서하구사(西河舊事)』에는 “사주(돈황)는 날씨가 청명하면 모래 우는 소리가 성안에서도 들린다.”라는 말이 실려 있다.

동서 40킬로미터, 남북 20킬로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모래 산을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일출이 바라보이는 산정까지 오르니 해가 막 지평선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일출이나 명사산의 전경도 전경이려니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월아천의 고아한 풍경이 일품이었다.

▲ 돈황의 월아천

달의 새싹, 즉 초승달 모양을 한 샘이란 뜻의 월아천(月牙泉)은 거대한 사막 지형 한가운데 솟아난 기적의 오아시스다. 이곳은 예로부터 ‘천고불학(千古不涸)’으로 일컬어질 만큼 수면이 넓고 수심이 깊어 영원토록 마르지 않을 호수로 여겨져 왔다. 지금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청나라 때는 큰 배도 다녔다고 한다. 20세기 초 월아천에서 낚시하던 사람이 “호수가 매우 깊고 바닥은 모래라 얼마나 내려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1960년 이전까지 월아천의 수량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월아천의 최대 수심은 9미터에 이르고 호수 면적도 4500여 평에 이르렀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 인근 황무지를 개간한다고 월아천을 비롯한 주변의 물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호수도 줄어들고 생태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1985년 월아천의 평균 수심은 7, 8십 센티미터까지 낮아지고 호수가 두 조각 나 초승달 모양이 없어지기에 이르렀다. 월아천의 고갈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자 돈황시는 2000년부터 응급조치를 취했다. 주변 관개수를 끌어다 월아천에 공급해 겨우 고갈만은 면하게 되었다. 2004년 들어 수위는 1.3미터로 오르고 면적은 1500여 평 정도가 되었지만, 오늘날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월아천은 언제 고갈될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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