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도 나도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하며 되도록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맘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 둘 다 사회적 능력이 부족하여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에도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관매도 단체여행은 가고 싶어 몸살이 났다. 일정을 보니 빡빡하긴 하지만 ‘의미’와 ‘여유’ 두 가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남편을 졸라 동의를 받고 여행을 신청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가장 먼저 어선을 동원해 현장에 달려가 구조한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관매도 주민이다. 매년 3만 여 명의 여행객이 오던 관매도에 세월호 침몰 이후 외지인의 발길이 뚝 끊겼다. 세월호 아이들이 아직 물속에 있는데 마음 아픈 곳에 놀러간다는 것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여행객 수입에 의존하던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졌다. 하여 사단법인 섬 연구소(소장 강제윤)는 한겨레에 '관매도 희망투어'를 제안하였고, 한겨레(www.mohani.co.kr)서 진행하게 되었다.   

관련기사 : 한 달에 한 번, 세월호를 만난다 : 관매도 탐방 1박2일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21

밤 12시에 출발해서 새벽에 도착하는 스케줄은 예순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벅찼다. 새벽 6시 막 넘어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까지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팽목항은 멍할 수 없는 곳이다. 1980년 공식적인 사망자 191명을 낸 ‘518 광주학살(민주화운동)’ 이후 처음 일어난 대참사다. 사망자 304명, 실종자 9명 중 단원고 학생 246명 사망, 4명 실종이다. 300명 넘는 사람들을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시켰고, 9명은 아직도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구할 수 있었는 데 구하지 않았다면 이후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 ‘세월호 학살’로 정정될 것이다.

팽목항 분향소는 첫 분향 손님으로 우릴 맞았다. 팽목항 분향소는 아주 작다. 38명이 들어가기도 벅차다. 이 작은 분향소도 없애길 바라는 이들이 있겠지만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분향소를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희생학생 삼촌은 검은 얼굴로 우릴 맞이했다. 세월호 참사를 국민들이 잊으면 어쩌나.. 아직 나오지 못한 희생자들을 포기하면 어쩌나..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덮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분이다.

 

영정사진이 놓일 곳에 사진 대신 노란 종이에 이름이 쓰여져 있다.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9명 희생자 이름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십자가가 놓여있다. 304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우리를 대신해 고통의 십자가를 졌다. 이 사회의 부조리, 불공정, 부패, 불투명을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해 죽음을 맞았다. 이 죽음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를 바꾸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 혹은 내 아이들이 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는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내 일이다.

분향 후 바다를 보고 있는 아픔의 부두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바다를 향해 절을 올리는 스님도 보인다. 참 고맙다. 그들이 함께 있어주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7시에 관매도 가는 배를 탔다. 나오는 배는 11시 30분 배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9시 50분 배를 타고 들어가 그 다음날 오후 1시 20분 배를 타고 나왔어야 했는데... 풍랑주의보 때문이다. 16일 11시 30분 이후로 배가 뜨지 못할 상황이 예측되어 ‘슬슬 걷기 관매도 여행’이 ‘수박 겉핥기 관매도 여행’으로 바뀌지 싶다. 배 밖에 서 있으니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 와중에도 이런 하늘을 보여주는 자연이 고맙다.

진도 팽목항에서 관매도까지는 배로 1시간 20분이 걸린다. 휴게실은 바닥이 매우 따뜻하다. 밤을 꼴딱 새고 달려 온 덕에 부족한 수면을 이곳 바닥에 누워 보충했다. 이젠 할머니뻘 아줌마라 뻔뻔해졌는지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냥 누워 쿨쿨 잠을 잤다.

관매도에 도착했다. 관매도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관매도리에 있는 섬으로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다. 관매산(219m)을 최고봉으로 섬의 대부분이 산지다. 해안의 모래사장은 아래 안내도에 보이는 것처럼 북서쪽으로 3㎞가 전부이고 대부분 암석해안이다.

관매 8경이 있다. 제1경은 관매도해수욕장, 제2경은 방아섬(남근바위), 제3경은 돌묘와 꽁돌이, 제4경은 할미중드랭이굴, 제5경은 하늘다리, 제6경은 서들바굴 폭포, 제8경은 하늘탑(벼락바위)다. 1박 2일을 관매도에서 보냈으면 적어도 8경을 대부분 볼 수 있었으련만 3시간 관매도 관광으로 우린 제1경 관매도 해수욕장과, 제3경 돌묘와 꽁돌이, 제5경 하늘다리만 다녀올 수 있었다.

우리는 선착장에서 아래 마실길 안내판의 오른쪽 점선을 따라 관호마을을 지나고, 현위치라 적힌 우실에 도착해서 오른쪽 해안을 따라 걷는다. 돌묘와 꽁돌을 지나고, 기억의 전망대 퍼포먼스를 갖고, 하늘다리를 거쳐, 관매도 선착장 입구로 다시 돌아나온다. 해수욕장 뒤의 솔숲을 맛만 보고, 후박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유채꽃밭에서 눈만 잠시 노닐다가 관매도를 나오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우실로 가는 길에 쑥밭 천지다. 관매도의 특산물 중 하나는 쑥이다. 각 가정에서 전통적으로 담근 쑥 막걸리도 유명하다. 담근 막걸리 한 잔을 마셔봤는데 좀 떫은 게 시골 농가의 탁주 맛이다.

관매도는 돌섬이기에 집담도 돌담이 많다. 제주도와는 다른 재질의 바위이지만 그 느낌은 비슷하다. 제주도 돌담같이 숭숭 구멍 난 바위들 틈새로 바람이 슝슝 지나가는 듯하다. 

우실에 도착했다. 바다와 마을 사이에 있는 언덕에 있는 돌담이다. 바람과 외부 재앙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우실을 두고 바다쪽 바람이 육지쪽 바람과 비교가 안 되게 세다. 바람을 막아주는 기능은 탁월!!!

우실을 지나 바닷가로 내려가니 돌묘와 꽁돌이 보인다. 꽁돌은 지름 4~5m 정도의 바위로 손바닥 손금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그 앞에는 왕의 묘를 닮은 돌묘가 있다.

기억의 전망대에 왔다. 회원들은 노란 리본에 글을 쓰고 줄에 달았다. 예술가 신은미씨가 기억의 전망대 명명식을 했다. 언제 저 팻말을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제거하면 또 다시 와서 달면 된다. 질기게 가는 놈이 이기는 거다.

기억의 전망대에서 하늘다리로 가는 길은 빼어난 절경을 보여주는 산책길이다. 발 딛는 길마다 예쁜 꽃들이 소곤소곤 봄기운을 속삭인다. 

하늘다리에 도착했다. 파도에 의해 갈라진 바위섬 두 개가 3-4m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두 바위섬 사이의 하늘을 이어서 하늘다리다. 

하늘다리를 끝으로 도로 돌아와 선착장에 왔다. 선착장 저 멀리 해변가 뒤로 솔숲이 보인다. 관매도 해수욕장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3만 평 규모의 솔숲을 가지고 있다. 300년 전에 심어진 솔숲이다. 여름에 와도 해수욕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솔숲을 걷고 싶을 것만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솔숲의 아주 일부만 걸어 많이 아쉬웠다. 관매도에 다시 발걸음을 하고 싶은 이유 1위가 바로 이 솔숲을 걷고 싶기 때문!!!

솔숲을 지나 관매마을로 들어서니 4월 유채꽃이 한창이다. 이 유채꽃은 관매마을 주민들이 여행객을 위한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일부러 심었다고 한다.

 

유채꽃이 한창인 곳에 천연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된 높이 18m, 둘레 3.42m인 약 8백년 된 후박나무가 늠름하게 서있다.

배에 탈 시간이 다가오는데 배에 가기 싫었다. 진도여행으로 대체 한다지만 관매도 여행의 '의미'와 '여유'에 비하겠는가? 맛보기로 본 그 맛에 취해 풍랑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연이 허락치 않은 걸... 언젠가 또 기회가 있겠지...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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