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일 신강(新疆) - 실크로드의 핵심 : 투루판(吐鲁番)

1. 투루판(吐鲁番) - 폭염 분지의 오아시스

▲ 황혼의 사막

명사산 일출을 보고 난 우리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 늦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잠시 쉰 다음 1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유원역으로 향했다. 투루판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섬서성, 청해성에 이어 감숙성을 떠나 드디어 신강위구르자치구로 들어가는 것이다. 청나라 때 새로 개척한 영토라는 뜻에서 ‘신강(新疆)’이라고 이름붙인 위구르족의 땅이다. 최근 들어 위구르족의 분리운동 움직임 때문에 정정이 불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닌 게 아니라 유원역 입구부터 보안 검색이 보통 수준을 넘었다. 짐을 따로 붙일 수 있는 비행기와 달라서 그런지 웬만큼 위협이 될 수 있는 물건은 아예 반입 자체를 막았다. 심지어는 손톱깎이마저 압수할 정도였다.

후진타오 시절 가속화된 서북공정 덕분에 신강으로 가는 철도는 빠르고 쾌적했다. 유원남역은 고속철도역이었는데 우리가 탄 열차는 고속철보다 한 등급 아래로 시속 200킬로미터를 유지했다. 세 시간 남짓 달려 투루판북역에 도착하자 후끈한 투루판 특유의 더위가 온몸을 휘감으며 달려든다. 위구르어로 ‘파인 땅’을 의미하는 투루판은 해수면보다 낮은 해발 -154미터의 저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여름철 기온이 거의 항상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니 그야말로 투루판 전역이 건식 사우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창고성과 현장법사

▲ 투루판의 고창고성

실크로드 여행자들이 투루판에서 가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 특히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은 일정에서 빠지지 않는 이 지역의 고대 도시 유적이다. 사막에 폐허가 되어 남아 있는 사원, 관아, 민가 등의 잔재는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끈다.

고창고성을 찾는 사람들은 이 지역이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이 위구르의 성을 봤다고 말하곤 한다. 8세기 이래 북아시아 유목 세계의 패자였던 위구르 왕국이 몰락한 뒤 그 유민들이 투루판을 점령하고 고창고성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끊임없는 이동을 특징으로 하는 유목국가가 정착을 의미하는 성에 머무른 것은 위구르 왕국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창고성을 처음 세운 것은 위구르족이 아닌 중국인이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이던 460년, 몽골계 유목민인 유연이 투루판을 공격해 이곳을 지배하던 북량(北凉)의 저거(沮渠)씨를 멸하고 감백주(闞伯周)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고창국의 시초였다. 이후 장(張)씨, 마(馬)씨, 국(麴)씨 등 한족이 잇따라 고창국 왕위에 올랐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간 것은 국씨 정권이었다. 중원에 수나라가 들어서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때는 군대를 보내 협조하기도 했다.

국씨 정권의 마지막 왕은 현장과의 인연으로 유명한 국문태(麴文泰)였다. 그는 629년 고창국을 방문한 현장의 설교에 반해 불교를 적극 보호하는 군주가 되었다. 현장을 위해 대불사를 짓고 그가 기거할 곳을 마련해 최대한의 예우를 베풀었다. 국문태는 현장을 자기 곁에 두고 싶었으나 인도로 가려는 의지가 강했던 현장은 한 달 만에 고창국을 떠났다.

현장이 인도에 가 있는 동안 고창국에는 큰 변고가 일어났다. 국문태가 당나라에 맞서 서돌궐과 동맹을 맺자 당 태종은 후군집, 설만균을 보내 고창국 정벌에 나섰다. 당나라의 침략에 직면한 국문태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고, 고창국도 640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태종은 그곳에 고창현을 세우고, 교하고성에 안서도호부를 두어 이곳을 통제하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장은 귀로에 투루판으로 가는 서역북도를 포기하고 서역남도를 거쳐 장안으로 향했다.

9세기 중엽 몽골고원에 있던 위구르 왕국이 키르기스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자, 그 유민의 일부가 843년 고창으로 와서 왕국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고대 위구르족을 회흘(回纥)이나 회골(回鶻)이라 불러 고창의 위구르 왕국을 서주회골국(西州回鹘國)이라 한다. 고창고성을 차지한 고창 위구르 왕국은 카라샤르, 쿠차, 하미 등을 병탄하고 타림 분지를 지배하다가 1275년 멸망했다. 오늘날 중국 영토의 1/6을 차지하는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위구르족은 바로 이 고대 위구르 왕국의 후예이다.

고창국의 공동묘지, 아스타나 고묘군

투루판에서 동남쪽으로 40킬로미터, 고창고성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고대 고창성 사람들의 공공묘지가 있다. 3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형성된 동서 5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 규모의 이 묘원은 아스타나 고묘군(古墓群)으로 불린다.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서울’을 뜻하는 말로, 고창 위구르 왕국의 도성인 고창고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 같다.

아스타나 고묘군에는 서진 초부터 당대 중기까지 고창국에 살았던 귀족, 관원, 평민의 무덤 약 500여 기가 모여 있다. 왕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창국의 명장인 장웅(張雄) 부부와 아들 장회적(张懷寂)의 무덤은 확인되었다. 투루판의 기후가 워낙 뜨겁고 건조해 각각의 무덤은 천연 무균 환경을 가지고 있어 시신과 부장품이 천년 넘도록 부패하지 않은 채 보전되어 왔다. 대량의 문서, 그림, 인형 등이 처음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나라 때의 물만두마저도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 ‘지하박물관’이라는 애칭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곳의 무덤은 대개 가족묘로 되어 있는데, 대다수는 한족이지만 차사, 돌궐, 흉노, 고차 등 형제 민족의 무덤도 눈에 띈다. 여러 민족이 평등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 중원의 장묘 방식과 유사한 무덤들은 ‘甲(갑)’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하의 널방 앞에는 약 10여 미터 길이의 경사진 길이 놓여 있다. 널방의 높이는 대개 2미터가 넘고 넓이는 한 평이 조금 넘는다. 천장은 평면이나 아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시신은 토갱이나 간이 나무 침상에 누워 베개를 베고 얼굴에 수건을 덮은 채 눈을 감았다. 두 손으로는 나무를 쥐고 있고, 몸에는 면이나 비단으로 짠 옷을 둘렀다. 시신의 사방에는 정자 누각 모양이나 수레와 말의 의장, 거문고와 장기와 붓과 먹, 포도와 참외 따위 과일, 만두와 빵 등을 진열해 놓았다. 어떤 널방의 뒷면에는 인물, 새, 꽃, 산수 등의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필치가 매우 사실적이다. 아스타나 고묘군에서 발견된 진귀한 유물은 문서, 묘지(墓志), 그림, 각종 그릇, 고대 철전, 실, 각종 그릇, 철전(鐵錢), 실과 직물 등 만여 건에 이른다.

화염산

투루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서역북도에 자리 잡은 화염산일 것이다. 투루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화염산은 중생대 쥐라기, 백악기, 제3기의 적홍색 사암, 역암, 이암으로 조성된 산이다. 현지에서는 ‘붉은 산’이라 불리고 옛날에는 적석산(赤石山), 화산(火山) 등으로 불렸다. 동서 길이가 100여 킬로미터에 달하고 남북은 가장 긴 곳이 1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 마치 화염을 내뿜는 것처럼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831.7미터이고 평균 높이는 해발 500미터에 이르는 민둥산으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새 한 마리 찾아보기 어렵다. 한여름 태양이 내리쬐면 적갈색 산이 달아올라 사암이 작렬하고 불길이 하늘을 찌르는 듯해 화염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염산은 중국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여름 최고 기온은 47.8도이고 지표 온도는 70도가 넘어 계란을 올려놓으면 익을 정도이다. 재미있는 것은 연평균 기온은 14.5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5도를 넘는 날이 100일 이상이고 38도 이상은 38일이 넘는데 평균 기온이 이렇게 떨어진다는 것은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를 잘 알려준다. 1975년 7월 13일 기온이 측정된 이래 기온은 49.6도, 지표 온도는 83.3도가 최고 기록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곳을 중국의 열극(熱極)이라 하고 투루판을 화주(火洲)라 부른다. 또한 평균 강우량이 16밀리미터에 불과하고 그 절반이 여름에 내리기 때문에 중국의 건극(亁極)이라고도 한다.

화염산은 현장의 서역 행을 소재로 한 소설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삼장법사(현장) 일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산을 넘어야만 서쪽으로 계속 갈 수 있는데, 불길을 뚫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취운산 파초동에 사는 나찰녀로부터 파초선을 가져다가 부치는 것이었다. 손오공은 나찰녀에게 파초선을 빌리려고 근두운을 타고 파초동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찰녀는 옛날 삼장법사를 잡아먹으려다가 손오공과 싸움을 벌인 ‘홍해아’라는 요괴의 어머니였다. 나찰녀는 아들의 원수인 손오공에게 파초선을 부치며 싸움을 걸어왔다. 손오공은 파초선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멀리 날아가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나찰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나찰녀에게서 파초선을 빼앗았지만, 알고 보니 가짜 파초선이었다. 손오공은 생각 끝에 나찰녀의 남편인 우마왕으로 변신해 나찰녀를 속이고 진짜 파초선을 빼앗았다. 소식을 들은 우마왕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손오공은 우마왕을 죽이고 나찰녀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파초선을 부쳐 화염산의 불을 끌 수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막다른 길을 마주치게 되는데, 삼장법사 일행이 화염산 앞에서 길이 막힌 것은 그런 상황을 상징한다. 그리고 손오공이 목숨을 걸고 싸워 파초선을 얻은 행동은 어려움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결국 역사는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경계를 넘어서는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리라.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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