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불동 소공탑, 교하고성, 카레즈

베제클릭 천불동

▲ 투루판의 천불동
▲ 투루판의 천불동

화염산 아래 절벽 위에는 막고굴에 비해 규모가 작은 천불동이 자리 잡고 있다. 베제클릭 천불동이다.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산허리’이다. 벼랑 위 약 1킬로미터 범위 안에 3층으로 조성된 천불동의 총면적은 1200평방미터 정도이다. 이곳에는 모두 83개의 굴이 있었는데 현존하는 것은 57개이고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굴은 40여 개다.

6, 7세기 남북조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천불동은 당송 시기를 거쳐 10, 11세기 고창 위구르 왕국 시기에 번성했다. 이곳에 그려진 벽화는 대부분이 불교에 관련된 것들이지만, 20호굴에는 위구르 고창 왕국의 왕과 왕후가 그려져 있고 28호굴에는 고대 마니교의 생활 정경을 반영한 그림이 있다. 위구르 왕국이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13세기 말 고창 위구르 왕실이 감숙성의 영창(永昌)으로 이주하고 투루판에 이슬람교가 전래되면서 천불동은 점차 쇠퇴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막고굴이 그랬던 것처럼 천불동의 동굴과 벽화들도 서양 탐험대들의 약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04~1913년 사이에 벽화의 90퍼센트를 네 탐험대가 떼어내 현재 독일 베를린 인도예술박물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박물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인도국립박물관, 한국 국립박물관 등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소공탑

▲ 투루판 소공탑

 

투루판 소공탑

투루판은 포도로 유명하다. 특유의 뜨거운 햇볕이 포도 알을 실하게 키워 이 지역 효자 상품 노릇을 톡톡히 하게 한다. 그래서 투루판 시 동쪽 교외에는 포도향(葡萄乡)이란 마을이 있어 집집마다 다종다양한 건포도를 팔고 있다. 위구르족이 대부분인 이 마을에는 옛날 위구르 귀족이 세운 탑 모양의 이슬람 사원이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도 구경하고 건포도도 사서 가니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마운 사원이 아닐 수 없다.

그 탑의 이름은 소공탑(蘇公塔)이다. 소공이란 ‘슐레이만 공’이라는 뜻인데, 투루판이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1778년 이 지역 군왕이던 슐레이만이 자신의 아버지 에민 호자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은 사원이 바로 소공탑이다. 은 7000냥을 들여 이 탑을 짓기 시작한 사람은 에민 호자 자신이었고, 그래서 이 탑을 에민탑이라고도 한다. 한 탑이 때로는 아버지, 때로는 아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셈이다.

사원 하나 짓는 데 들어간 돈이 18세기 기준으로 은 7000냥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20세기 들어 막고굴 장경동의 그 무수한 보물들을 빼 간 돈이 수백 냥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 교하고성

▲ 투루판 교하고성

고창고성에서 서북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야르나즈 계곡에 또 하나의 고대 성시(城市)가 있다. 교하(交河)고성이다. 경기도 파주에도 교하라는 지역이 있는데 한강과 임진강이 교차하는 곳에 발달한 평지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교하고성도 비슷해서 야르나즈 계곡 아래 흐르는 무르투크 강 위에 있는 버들잎 모양의 섬에 건설된 성이다. 강이 이 성을 만나 갈라졌다가 성을 지나 다시 만난다는 의미에서 교하라고 불린 것이다. 현지 말로는 ‘야르허투’라고 하는데 강의 도시라는 뜻이다. 강 한가운데 형성된 30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세워진 성이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고성이 개방되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지만 정작 성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40도를 훌쩍 넘는 날씨였다. 강렬한 햇볕을 피할 지붕 하나 없이 1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유적을 걷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모두들 열심히 걷고 열심히 보았다.

도대체 이렇게 더운 곳에 어떻게 도시를 짓고 살았을까? 교하고성을 걷다 보면 그런 의문이 저절로 든다. 물론 옛날에는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숲도 많고 기후도 덜 더웠을 것이다. 또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교하고성의 도시 구조 역시 우호적이지 않은 기후에서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이 성을 짓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였다. 지금은 사라진 이란계 고대 민족인 차사인이 건조하기 시작했는데, 앞서 고차고성 인근의 아스타나 고묘군에서도 차사인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차사국을 세우고 450년까지 존립했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의 부여와 대체로 일치해 나는 차사국 하면 부여가 떠오르곤 한다.

차사국을 정벌한 당나라는 이곳을 교현에 편입시켰고 640년에는 고창국을 멸한 뒤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해 쿠차로 옮길 때까지 서역 경영의 기지로 삼았다. 이후 위구르 왕국의 교하현이 되었다가 840년 위구르 왕국이 키르기스족에게 무너진 뒤에는 잇따른 전쟁에 시달려야 했다. 몽골제국 시절에는 대칸인 쿠빌라이에 맞선 카이두 세력과 제국 군대 사이의 전쟁으로 교하고성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또 불교를 믿어 오던 교하고성 주민들은 이곳을 지배하던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자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요당해 정신적으로도 공황 상태를 겪어야 했다. 결국 14세기 이래 교하고성은 버려진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왔다.

남북 1650미터, 동서 약 300미터로 여의도공원의 두 배 정도 되는 교하고성은 사원, 민가, 관공서 등으로 구분된다. 현재 남아 있는 건축물은 대개 당나라 때 고쳐 지은 것으로 건축 구성은 송나라 이전 중국 도시의 특징을 보여 준다. 천연 요새라고 해도 늘 외침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성 전체가 겹겹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대보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담장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담장 안에 있는 사람은 안팎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남북으로 뻗은 길이 약 350미터, 너비 10미터의 대로가 성안을 동서 양 부분으로 나누고, 대로의 북쪽 끝에는 대규모 사원을 중심으로 사원 구역이 형성되어 있다. 한쪽으로는 수많은 탑이 모여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고승의 사리를 보관한 탑일 가능성이 높다. 동남쪽에는 으리으리한 지하 저택이 남아 있다. 이 저택에는 채광을 위한 11평방미터의 천정(天井) 구멍이 있어 동쪽으로 대로와 면한다. 문은 사중으로 되어 있고 천정 바닥에는 너비 3미터 높이 2미터의 지하도로가 있는데 그 길이는 60미터로 남북대로와 통하게 되어 있다. 이 저택이 바로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서쪽에는 여러 수공업 공방이 있는 방(坊)이 있다. 대로 양쪽에 높고 두터운 토담이 있고 담 뒤에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짧은 골목들이 있으니 이것이 ‘방’이다. 토담은 대로 쪽으로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각각의 방에는 방적, 양주, 제화 등의 수공업 공방과 주거지가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군영과 민가가 있다.

교하고성의 건물들을 짓는 데는 세 종류의 건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첫째는 중국 전통의 ‘항축법(夯築法)’이다. 앞서 장안성에서도 보았듯이 이 방법은 정제된 흙을 별도의 판재 없이 다져서 쌓는 건축 기법이다. 교하고성에서는 바닥이 평탄하지 않은 땅에 건물을 올릴 때 사용한 방식으로 그다지 많지는 않다.

주거지, 담장, 문 등 가장 기본적인 건축물을 만들 때 사용한 교하고성 특유의 건축법은 ‘감지유장(減地留墻)’이라는 방식이다. 글자 그대로 땅을 깎아내고 담장을 남기는 것으로, 파내기 좋은 황토로 되어 있는 지질을 활용한 기법이다. 마치 판화의 음각 기법처럼 황토를 파내려 가면서 두꺼운 벽체를 남겨 담장이나 문을 만들고 벽체 안쪽에 각종 시설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지면보다 높은 건축물을 쌓을 때는 판축법(版築法)을 사용했다. 풍납토성 같은 백제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으로 항축과 비슷하지만 네모난 판자 안에서 흙을 다지고 다져 벽돌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쌓는 방식이다.

대개 고대의 성들은 네 군데 이상 성문을 두게 마련이지만 교하성은 동문과 남문만 설치했다. 성이 30미터 높이의 절벽에 있어서 성벽을 쌓을 필요는 없었다. 성문도 정식 건축물은 아니다. 남문은 군수 물자와 말 먹일 풀이 드나들고 대군이 출입하는 주요 통로였다. 그 지세가 워낙 험준해서 ‘한 명이 지켜도 만 명이 들어갈 수 없는’ 관문이었다. 오늘날에는 돈만 내면 모든 사람이 이 문을 통과해서 성안을 구경할 수 있다. 동문은 30미터 낭떠러지 위에 있는데, 주로 성내 주민이 물을 길어오던 문이었다.

오늘날 교하고성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허’로 불리며 타는 듯한 날씨에도 끊임없이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실크로드 존재 이유, 카레즈

돈황의 당하, 명사산의 월아천처럼 실크로드 연변에는 오아시스가 있다. 인근 산에서 흘러내린 생명의 물로 이루어진 오아시스가 없었다면 실크로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막에 살던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오아시스에만 기대고 있지 않았다. 때로는 멀리 떨어진 산에서 지하수를 퍼내 인공의 관개수로를 만들어 생존을 도모했다. 그런 노력을 눈물겹게 보여주는 것이 투루판의 카레즈(坎儿井)이다. ‘우물’을 뜻하는 카레즈는 사마천의 『사기』에도 ‘정거(井渠)’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만큼 오래된 특수 관개 시설이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 인공 수로를 따라 투루판 분지까지 흐르게 해서 열사의 땅에 포도밭을 일구게 한 인간 승리의 증거이다. 만리장성,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고대의 3대 공정으로 불린다. 무슨 지하 관개 수로가 만리장성과 비교되겠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러한 카레즈가 무려 1100곳에 이르고 전체 길이가 약 5000킬로미터나 된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의 10배가 넘는 지하수로가 인간의 힘으로 천산산맥과 열사의 분지를 거미줄 같이 잇고 있다.

카레즈의 구조는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지하수를 일정한 높이까지 끌어 올리는 수정(竪井), 그렇게 끌어 올린 지하수를 흐르게 하는 지하수로(渠道)와 지상수로, 그리고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涝坝)이다. 투루판 분지 북부의 보거다(博格达)산, 서부의 카라우청(喀拉乌成)산에 쌓인 눈이 봄과 여름에 빗물과 함께 녹아내리면, 이 물이 산골짜기를 흘러내려 고비사막 밑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산의 경사를 이용해 카레즈를 만들고 그 물을 끌어올려 관개농업에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카레즈는 한여름의 더위로 수분이 증발하거나 폭풍으로 물이 사라질 걱정 없이 유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창조적인 방법이다. 놀라운 것은 아편전쟁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신강으로 좌천되어 온 임칙서가 카레즈의 확대 증설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국가는 그를 버렸지만 그는 버림받은 곳에서도 인민과 함께 했다. 애국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글/사진  강응천 역사저술가 및 출판기획자, 인문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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