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한겨레> 창간 발기인이자 논설위원을 지낸 조성숙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지난달 19일 향년 81세에 별세했다. 그는 1935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65년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여 활동하였다. 75년 동아일보사 기자·피디들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나서 해직된 뒤 2002년에는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아 복직투쟁을 이끌었다.

▲ 한겨레 자료사진: 고 조성숙 전 한겨레 논설위원

88년 5월 ‘한겨레’ 창간 뒤 논설위원, 기획위원 등을 맡아 ‘위안부 피해 대책’ 등 여성문제 여론화에 앞장섰다. 한림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가족치료 연구과정을 수료한 뒤 ‘조성숙가정폭력상담소’를 열어 여성 인권 보호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그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한국가족문화원 이사 겸 부원장, 강남가족상담센터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그가 쓴 책은 <어머니라는 이데올로기-어머니의 경험세계와 자아찾기>(한울·2002년), <여자로 산다는 것>(2012·한울) 등이 있다. 2008년부터 신장 투석 등 투병생활을 해온 고인은 2014년 자전에세이 <한겨레와 나>를 정리해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다. 그 책에 실린 글을 여기서 연재한다.

 

어린시절-어머니의 격려, 그리고 합격자 발표(4)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서울 지리를 모르는 내가 학교 위치를 알아 두어야 했다. 내게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외사촌 오빠가 둘 있다. 한 오빠를 졸라서 학교에 가보기로 하였다. 서울 시내버스를 타고 문리과대학 앞에서 내렸다. 학교길 건너 의과대학 앞에서 학교를 찬찬히 보았다. 개천을 건너서 교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에 정원수가 적당히 심어져 있고 그 사이로 타일 색이 누르스름한 빌딩이 보였다. 학교가 멋있었다. 나는 수줍어서 오빠에게 학교 구경 시켜달라는 말을 못 하고 가자고 졸랐다. 오빠가 억지로라도 교내를 구경시켜 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면서 발길을 돌렸다. 바보처럼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 무렵 나는 아버지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면 학비 대기가 어려우니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수원의 서울대 농과대학을 가라고 고집하셨고 나는 나의 목표대로 서울대 문리과대학을 가기로 맘먹고 아무 대꾸도 없이 진행하였다. 내가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격려 덕이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쌀 팔아서 내가 학비 대마”라고 말씀하셨다(그 무렵 서울대 입학금은 5만 환이고, 한 학기 등록금은 1만 환이었다. 어머니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어머니는 “내가 못 배워 답답해서 그러니 너는 하고 싶은 공부 해봐라”, “붙든지 떨어질지 점 좀 쳐보면 어떻겠니?” 하시기에 자신도 없고 해서 어머니 말을 따랐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주소를 들고 고등동(수원여고 금방) 점집을 찾아갔다.

작은 소반에 쌀을 소복이 담아 나온 점쟁이는 생년월일을 묻고 쌀을 두 알씩 집어내어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북쪽에 가서 망신당할 수”라는 것이다. 우리 집의 북쪽은 서울이요, 서울 가서 망신당한다는 것은 곧 시험에 떨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별로 놀라지도, 맘에 깊이 새기지도 않고, 속으로 코웃음 치면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들 발원 때문에 믿음을 가진 분을 다양하게 알고 지냈다. 막상 시험 날짜는 가까워 오는데 가 있을 집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 치성을 드린 적이 있는 불교 보살 양순자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여 시험 기간 동안 그 집에 가 있게 되었다. 원서동의 깎아지른 듯 가파른 계단 골목길 중간에 위치한 그 집에서 시험 전날부터 묵었다. 올라가긴 힘들어도 일단 들어가 안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비원의 경치가 그만이었다.

이튿날 시험 당일 아침, 일찍 나와 함께 학교에 간 양순자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교정을 돌면서 군데군데 소금을 뿌리며 입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그런 후 할머니는 집으로 가시고 나는 홀로 시험실을 찾아갔다. 시험 문제는 의외로 쉬웠다. 희경이와 계획한 대로 답안지를 작성했다. 대만족은 아니지만 개운했다.

며칠 후 합격자 발표 날이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지냈던 나는 발표 날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하는데 떨어졌을 자신을 보는 것이 싫어서 사촌 오빠한테 보고 오라고 부탁했다. 오빠는 저녁에 퇴근해서야 나한테 알려주는 것이었다. 붙었다는 것이다. 이튿날 확인하러 나 혼자 학교에 갔다. 건물 꼭대기에 붙은 합격자 명단은 겨울바람에 찢겨 너울거리고 있었다. 내 이름도 절반은 찢겼다. 더 늦었으면 못 볼 뻔하였다.

 

▲ 1975년 이전하기 전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사진 출처 : 서울대 홈피)

어쨌든 합격이라니 이같이 기쁜 일이 또 있으랴. 우선 모교에 가서 선생님들에게 보고하였다. 선생님들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은 솔직히 학생들의 진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뜻밖에 내가 소리 없이 혼자서 서울대 중에서도 어려운 문리대에 합격한 것이 놀랍고 기쁜 것이다. 평소에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교육 선생님과 ‘말코’ 국어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시고 점심 사주시겠다는 걸 거절하였다. 학교에 내 체면이 서고, 자존심도 올라갔다. 나하고 같이 시험 본 동기생 농대 교수 딸은 떨어졋다. 둘이 같이 다니면 좋을 텐데 안 됐다. 그 애는 나중에 숙대로 진학했다. 결혼 후에는 남편과 아들을 일찍 여의고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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