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자(仁者)가 아니지만 산을 좋아한다. 바라만 보아도 시원한 한여름 녹음이 우거진 산도 좋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단풍 산도 좋다. 백설로 뒤덮인 한겨울 순백의 설산도 물론 좋다. 그러나 나는 요즈음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초봄의 산이 가장 좋다. 이제 막 유록빛 새순이 돋아나는 넓은잎나무들과 늘푸른 바늘잎나무들이 알맞게 섞여 있는데다가 벚나무, 복사나무, 개살구나무, 산돌배나무 들이 여기저기 울긋불긋 피어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한다.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이맘때의 먼 산 풍광은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몸가짐이 무겁고 마음가짐이 너그러운 사람이라야 이웃이 많은 법, 산도 마찬가지다. 품이 넓고 골이 깊은 산이라야 품고 있는 생물종도 다양하다. 특히 새잎이 나고 새순이 돋아나는 요맘때 북쪽 사면 물이 흐르는 계곡에 근처에 가면 가지각색 풀꽃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키가 작은 풀꽃들은 키가 큰 나무들이 무성해지기 전에 잎을 돋우고 꽃을 피워야 한다. 그래야 광합성을 왕성하게 하여 양분을 만들어 뿌리에 저장하고, 곤충들을 불러들여 수분을 할 수 있다. 수분이 이루어져야 결실할 수 있고, 결실이 돼야 2세를 남길 수 있다. 온전히 결실하여 2세를 퍼뜨리고 나면 키 작은 풀꽃들은 언제 그랬는가 싶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키가 큰 나무들의 세상이 된다. 이렇게 하여 풀과 나무가 더불어 살아가는 숲 속의 생태계는 해를 거듭하며 건강하게 존속한다.

요즈음 물이 흐르는 산간 계곡 근처 다소 습기가 많은 곳에 가면 여러 가지 봄꽃들이 현란하게 피어 있다. 샛노란 꽃이 큼직하게 피어 돋보이는 피나물을 비롯하여 긴 꽃자루에 주렁주렁 달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한 가지색 미치광이풀, 앙증맞은 하얀 꽃이 하나씩 달리지만 무더기무더기 무리지어 피는 홀아비바람꽃, 치맛자락을 땅바닥에 쫙 펼치고 있는 듯 피어 있는 보랏빛 처녀치마, 얼룩덜룩한 두 장의 잎을 달고 수줍은 처녀처럼 고개를 숙이고 피어 있는 보랏빛 얼레지, 꽃을 피우고 나면 몰라보게 길게 뻗어가는 벌깨덩굴, 꽃잎이 네 갈래로 갈라져 마치 십자 모양으로 피는 는쟁이냉이, 미나리냉이 등의 십자화과 가족들, 파란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듯 피어 있는 여러 가지 현호색 족속들, 혼례 때 새색시 이마에 올리는 족두리 같이 생겼다고 해서 명명된 족도리풀, 숲 속의 요정처럼 볼수록 앙증맞은 금붓꽃, 각시붓꽃 등등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높은 산 깊은 골이 아니면 만나볼 수 없는 꽃 ‘연령초(延齡草)’, 처음 보는 사람치고 그 우아한 자태에 입이 쩍 벌어지지 않을 사람 있을까? 이름 그대로 사람의 수명을 더욱 길게 늘여 준다는 ‘연령초(延齡草)’가 있다. 마치 늘씬한 키에 얼굴이 허여멀쑥한 귀공자가 풍성한 초록색 망토를 걸친 듯한 풍모라고나 할까?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피어 있는 연영초(延齡草)에 반하지 않을 사람 없으리라. 그래서 일까, 연영초는 특히 유럽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 연영초

‘연영초(延齡草)’라는 국명은 1949년 정태현 외 2인의 “조선식물명집”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국명은 중국명 ‘延齡草’를 그대로 차용한 것인데 이를 ‘연영초’로 잘못 읽고 표기한 것이다. 그러다가 1980년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에 어법에 맞게 ‘연령초(延齡草)’라는 이름으로 등재된다. 중국명을 차용한 ‘연영초, 연령초’ 이 외에 ‘왕삿갓나물, 큰꽃삿갓풀’ 등의 순우리말 다른 명칭도 있다. 그런데 왜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연영초’를 추천명으로 삼았을까?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지어 출생신고를 하고 그 이름으로 평생 불러지듯 식물도 이와 마찬가지다. 비록 어법에 맞지 않는 국명이라도 그 식물의 고유한 이름으로 간주하고 그대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학명으로는 “Trillium kamtschaticum Pall. ex Pursh”라고 한다. 속명 ‘Trillium’은 3을 뜻하는 ‘treis’에서 유래된 말인데 잎과 꽃받침, 꽃잎이 모두 3장인 데서 유래한다. 종소명 ‘kamtschaticum’은 '캄차카의'라는 뜻으로 자생지를 밝힌 것이다. 연영초의 학명은 잎, 꽃받침, 꽃잎이 모두 3장씩 달려 있는데 러시아 캄차카에 나는 식물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 연영초

연영초는 분류학상 백합과 연영초속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보통 굵고 짧은 뿌리줄기에서 2대의 줄기가 모여 나와 높이 20~40㎝ 정도로 자라는데 비스듬히 서는 특징이 있다. 잎은 3장이 줄기 끝에 돌려나는데 잎자루가 없다. 잎 모양은 넓은 난형으로, 길이와 폭이 7~15cm 정도로 큼직하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5~6월에 돌려난 잎 중앙에서 나온 1개의 꽃자루 끝에 1개씩 달려 핀다. 꽃받침잎은 3장이며, 끝이 뾰족한 난형 또는 타원형, 길이 2.5~4㎝, 녹색이다. 하얀 꽃잎은 3장이며, 끝이 둔한 난형 또는 타원형으로 길이 2.5~4㎝, 폭 1.0~1.5cm이다. 수술은 6개, 씨방은 원추형이며 암술대는 3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장과이며, 지름 2~3cm 정도로 둥글다.

▲ 연영초

연영초는 러시아(아무르, 우수리, 사할린, 캄차카), 중국(동북부), 한국, 일본 등 주로 동북아시아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경기, 충북, 경북,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 숲 속 계곡 근처 습한 곳에 드물게 자란다. 그래서 환경부에서는 국외반출 승인대상 식물자원으로, 산림청에서는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선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연영초속 식물에는 연영초 외에 큰연영초가 있는데 남한에서는 울릉도에 자란다. 큰연영초는 연영초에 비해 잎이 큰 반면 꽃은 작고, 연영초의 씨방이 흰색 또는 연노랑을 띠는 데 비해 큰연영초의 씨방은 검은색 또는 갈색을 띠고 있어 육안으로도 쉽게 식별된다. 전초를 연영초라 하고 뿌리줄기를 말려서 연영초근이라는 약재로 쓰는데 위장약, 수렴제 및 거담제로 약용한다. 꽃이 우아하고 탐스러워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다. 보매 잎이 커서 쌈으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독이 강해서 생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한다.

▲ 큰연영초

연영초가 정말 우리 수명을 연장시켜 줄까? 설령 목숨을 늘여 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다. 몇 년 전 이맘때 중국 땅 백두산에서 처음 본 연영초가 눈에 선하다. 북녘 우리 땅 어디메에도 연영초가 깃들어 살고 있을 것이다. 어디 연영초뿐이겠는가? 남한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식물도감 사진으로만 구경하는 식물들이 참 많다. 백두산뿐 아니라 금강산에도 가고 싶고, 묘향산에도 가보고 싶다. 북녘 땅에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내 발로 직접 걸어가서 내 눈으로 똑똑하게 만나볼 수 있는 날이 언제 올까? 한반도의 온전한 식물상은 언제 이루어질까? 지금 우리는 섬 아닌 섬나라에 살고 있는 것을…….

▲ 연영초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이호균 주주통신원  lee1228hg@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관련기사 전체보기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