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한국학교에 들어가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척들을 만났을 때였다. 아이들 고모가 두 아이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애들이 2년 만에 사람이 돼서 왔네요.” 그 때 나는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기 전, 한 아동복지시설 원장님이 일에 몰두하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남의 아이들 챙기지 말고 내 아이 먼저 챙기세요.” 이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내 아이들? 잘 클 거야. 지금도 착하게 잘 크고 있는데.. 그 씨가 어디 가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 미국에 가서 두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 원장님의 말씀이 수차례 떠올랐다. 우리 아이들은 들에 풀어 논 강아지, 망아지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부모의 알뜰한 보호와 제대로 된 훈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과 비교하면, 두 아이는 막 자란 아이들처럼 보였다. 학교에 가면 그러지 않은 것 같은데 식당 같은 곳에 가면 금방 티가 났다. 특히 나와 함께 있으면 더 그런 것 같았다. 내 말이 먹히지 않았다. 둘이 많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둘의 생각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둘이 마음이 맞으면 고집을 피우며 큰 소리로 따졌다. 처음에는 어디 가는 게 겁날 정도였다. 2년 동안 이를 끊임없이 부드러운 말로 설명해주고 이해시켜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올 쯤 어디다 내놔도 걱정이 없는 예의바른 아이들이 되었다. 아이들 고모의 말처럼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내가 결심한 것이 있었다. 적어도 아들 초등학교 졸업때까지는 아이들만 집에 두고 직장에 다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반듯하게 바뀐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특히 아들을 생각하면 더욱 더....

미국학교에 잘 적응했던 아들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구직도 포기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 속마음에는 아들에 대한 걱정이 여전히 있었다. 예전에 유치원 선생님이 말씀했던 '한국어 준비학습 미비로 인한 이해력 부족'과 '대인관계' 등이 걱정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한국어 보다는 영어가 더 익숙한 것이었다. 2년 영어권 나라에서 살다 오니 입에서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빨리 튀어나왔다.

하루는 택시를 타고 가는데 딸과 아들이 택시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사람들 앞에서는 한국말을 쓰라고 단단히 교육을 했기에 처음엔 둘이 한국말로 했다. 그러다 뭔가 의견이 안 맞자 티격태격하기 시작하면서 말의 속도가 빨라지더니 영어로 말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싫은 소리를 한다는 말이 딸이 “You are fungus.(너는 곰팡이야)" 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들도 ”You are fungus, too." 라고 했다. 나는 ‘곰팡이’를 주고받는 아이들이 웃겼지만, 웃음을 참으면서 얼른 택시 기사아저씨에게 “미국서 살다가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돼서 영어가 먼저 튀어나와요. 이해해주세요.” 라고 했다.

학교에서 한국말을 못하고 영어가 튀어나오면 친구들에게 잘난척한다 소리 듣기 십상이고 더 심해지면 왕따되기 십상이란 소리를 들어 자꾸 한국말로 말을 하라고 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딸은 한 번도 적응에 문제를 보인 적이 없어서 1%의 걱정도 안했지만, 아들은 눈치가 좀 없는 편이라서 의식해서 될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박한 동네에서 순박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맞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보다는 시골이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남편 직장 때문에 서울 근처를 떠날 수는 없었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좀 시골 냄새가 나는 곳이 어딜까 찾아보다가 원하는 곳을 찾았다. 서울과 경계선에 있는 동네인데 학교가 마음에 들었다. 학교 건물은 낡은 시골학교 같았다. 그 당시 서울에는 조개탄 때는 초등학교는 없었는데 그 학교는 조개탄을 땔 정도니 얼마나 옛날식인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년마다 2~3개 반밖에 없는 아주 작은 학교여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사를 결정하기 전, 학교를 방문하여 교장선생님을 만났을 때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여기는 시골과 도시가 함께 공존하는 학교라서, 아이들이 방과 후에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맘껏 뛰어 놉니다. 학교에서도 ‘공부, 공부’ 안합니다. 원래는 다 농사짓고 산 밑에서 살던 집 아이들만 다녔는데, 길 건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아파트에서 온 아이들이 반 정도 차지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아파트 아이들과 예전 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잘 지냅니다.”라고 하셨다. 교통도 서울에서 전철로 한 정거장 떨어져서 그럭저럭 생활하기 편하다 싶은 곳이라서 우리는 두 번 생각도 안 해보고 학교 길 건너 아파트에 새 둥지를 틀었다.

아들은 9월에 1학년 2학기로 들어가야 해서 방학 한달 동안 열심히 한글과 수학을 가르쳤다. 수학은 쉽게 이해하는데 한글은 역시나 어려워했다. 한글하고 뭔가 안 맞는 아이 같았다. 간신히 읽고 쓰는 기초과정만 떼고는 1학년 2학기로 들어갔다.

학교 가기 전날 아들을 데리고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하러 갔다. 감춰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름일 뿐이지 큰 허물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들의 성격 및 성장과정에 대하여 간략히 말씀드렸다. 나이 지긋한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내 말을 잘 들어주셨다.

처음으로 한국 학교에 가는 날, 아들은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 선생님께서는 미국에서 2년 지내다 온 학생이라고 소개해주시면서 우리말이 좀 서투르니 잘 도와주자는 말씀도 덧붙였다. 반에서 가장 빠릿빠릿한 학생을 도우미로 붙여도 주셨다.

선생님께서 많이 배려해주셨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은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고, 심지어 ‘미친 놈’ 소리도 들었다. 친구관계에서도 점점 소외되는 것 같았다.

전문가들은 언어발달의 결정적 시기를 2세에서 5세까지로 보고 있지만, 아들은 그 시기에 충분한 언어발달을 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에서의 6-7세 2년이 언어발달에 결정적시기였던 것 같았다. 집에서 우리말보다 영어로 더 편하게 말했고 만화영화를 보며 영어대사를 줄줄 따라했다. 급하게 반응해야할 때 먼저 나오는 말도 영어였다. 학교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무슨 말을 물어보면 멍하니 답을 못하곤 했다. 원래 반응이 좀 느린 편이기도 하지만 한국 말이 입에서 빨리 빨리 나오지 않으니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다른 아이들은 다음 단계로 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아들을 아이들은 ‘바보’ 라고 놀렸고 아들은 이를 슬퍼했다.

아들은 다른 아이들의 무례한 행동도 못견뎌했다. 욕을 섞어 가면서 거칠게 말하는 아이들을 힘들어했고, 자신의 영역에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싫어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책상 가방걸이에 걸어놓은 가방을 지나가다 떨어뜨리고는 사과하지 않는 아이들을 이상하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당연히 ‘sorry'로 해결해야할 행동이기 때문이다. 수차례 참다가 가방을 떨어뜨린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가방을 걸어달라.”고 요구했다가 '미친 놈' 소리도 들었다. 그 아이는 그런 요구를 하는 아이를 처음 보았을 거고, 아들은 그런 반응을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런 까칠함 때문인지 아들은 특히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물과 기름같이 겉돌았다고 할까? 집으로 데려오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따뜻한 돌봄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없이 그럭저럭 1학년 겨울방학이 되었다. 

▲ 1학년 겨울방학에 어린이 박물관에서. 이때만 해도 명랑했는데...

겨울방학동안 아들은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는지 태권도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너무 빼빼 마르고 아직 뼈가 여리다고 생각해서 좀 두고 보자고 했으나 아들은 집요하게 요구했다. 한 번 상담이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태권도 학원을 방문했더니 아들은 무척 맘에 들었는지 거의 결사적으로 나왔다. 결국 그해 겨울방학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까지 7년 동안 태권도를 했다. 태권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가는 취미활동이 되었고, 현재 아들의 체구와 체력에 상당한 기여를 해준 고마운 운동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미경 부에디터  mkyoung6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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