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뒤를 돌아 석호정(石虎亭) 앞을 지난다. 석호정은 조선 인조 때 지은 사정(射亭)으로 활터를 말한다. 석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석호라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초나라의 웅거자라는 용사가 캄캄한 밤길에 어마어마한 호랑이가 덤벼들자 활을 쏘았는데, 그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발견한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다. 그 바위에 그가 쏜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 고사는 정신을 집중하면 하나의 화살로도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란 격언이 떠오른다.

▲ 석호정

벌써 왕벚나무 벚꽃은 만개한 후 바람 부는 대로 꽃잎이 휘날리고, 붉은 빛을 띠는 산벚나무 벚꽃은 이제 막 피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진달래꽃의 분홍빛 화장은 옅어졌는데, 철쭉은 짙은 빨강색 단장을 오연하게 뽐내고 있다. 철쭉은 붉은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연분홍 진달래는 연분홍 연가를 그윽이 부른다. 그런가하면 흰 철쭉은 순백의 화환을 전신에 두르고 서럽고 서럽게 이별가를 부른다. 화려했던 날들을 뒤로하고 떨어진 꽃잎들이 바람 따라 머나먼 여로에 오르는 것은 이별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춘색(春色)을 완상함은 기쁨으로 충만해야할 텐데 쓸쓸해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기 때문일까? 엊그제 그 청아한 자태가 오늘 벌써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나날이 저렇게 이지러지고 있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 오고 갈 때마다 잠깐 머무르다 떠나는 저 찬란한 춘색을 앞으로 몇 번이나 맞이하고 또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면 기쁘기보다 오히려 허허롭고 쓸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동료들이 나에게 나무 이름, 꽃 이름을 묻는다. 나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귀룽나무의 그 새하얀 꽃송이가 총상꽃차례에 촘촘히 맺혀 이삭처럼, 꼬리처럼 흐드러지게 매달려있다. 귀룽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그곳에서는 뿌리 밑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산다고 하여 구룡나무라고 부른다. 봄이 오면 산기슭의 습한 곳에서 제일 먼저 싹을 틔우는 봄의 전령사다. 매화가 꽃의 전령사라면 귀룽나무는 잎의 전령사다.

길가 꽃밭에는 금낭화며 조팝나무 꽃도 눈부시다. 금낭화는 귀엽고 붉은 복주머니를 꽃대를 따라 듬성듬성 매달고 있다. 작년인가 내가 독립공원에서 조팝나무 꽃을 보고 읊은 시가 생각난다.

조팝나무

개나리 벚꽃 목련의 함성

어두운 시대의 잠을 깨우더니

잔치는 끝나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다

 

벗들이 떠난 자리 아쉽고 허전한데

청결한 아이들의 고사리손이

새 생명을 고무하는 징소리

해일처럼 밀려오고

 

이단아를 다독이고 삐친 아를 어루만져

질서를 세우느라

순백의 곤봉

끊임없이 휘두른다

 

애교로 보지 마라

바람 불면 더 휘황한

순교의 등불

메마른 대지에 흰 피를 뿌릴지니

▲ 금낭화

그냥 지나치려는데 수선화가 ‘나도 좀 귀여워해주세요.’ 하고 수줍게 속삭인다. 흰 꽃잎 속에서 짙은 노랑 꽃잎이 내면의 정열을 보여준다. 매혹적인 자태다. 영어로는 daffodil이라고 하지만, 그리스신화에서는 narcissus다. 우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하여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애절한 꽃. 누가 그를 구해주지 못할까? 흔히 자기도취의 대명사로 불리는 꽃이다. 저 유명한 윌리엄 워드워즈의 ‘수선화’가 떠오른다.

▲ 수선화

---전략---

가끔 허허롭거나 애수에 젖어

나 홀로 자리에 누워있을 때

그대 마음속에 떠오르나니

고독의 축복이어라

---후략---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산책로 가장자리를 따라 벚나무를 심었다. 저것들도 3년 후면 화려한 꽃을 피울 것이다.

산책로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남쪽 기슭에 있는 와룡묘(臥龍廟)를 보았다. 제갈량과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와룡묘의 한 계단 위에는 단군상을 모시는 단군성전이 있고, 또 그 위 계단에는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모시는 산신각이 있다. 그 중에서 독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뒤에 알아보니 우리나라 불교신앙에서 홀로 깨우침을 터득한 소승불교의 성자들이라 한다. 이 사당들은 중국의 신앙과 우리의 토속신앙을 결합한 독특한 신앙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기분은 썩 개운치 않다. 조선이 명나라의 제후국임을 증명이라도 한다는 것인가?

▲ 와룡묘

예장동 산자락에 이르니 조지훈 시비가 서있다. 비석에는 ‘파초우(芭蕉雨)’가 새겨져있다. 일제강점기에 시인은 어느 고요한 산사의 승방에서 파초 잎에 후두기는 빗방울소리를 들으며 식민지 지식인의 암울한 미래상을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에 띄어 보내고 싶었으리라.

▲ 조지훈 시비

회현동 케이블카 승강장이 가까운 곳에서 「한양공원(漢陽公園)」의 표지석을 보았다. 일제강점기 남산 밑 회현동, 묵동, 필동, 예장동 일대는 일본 식민지통치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일본공사관을 시작으로 통감부와 총독부가 있었고, 통감과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남대문시장이며, 명치정(明治町: 현재의 명동)이며, 충무로는 물론이고 을지로 입구까지도 일본 상인들의 주무대였다. 이를테면 이곳이 일인들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식민지 착취의 본거지였다. 일본인 거류지역 외곽, 전에는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었고, 현재는 「안의사광장」이 되어있는 곳 일대에 왜인들은 1908년부터 약 30만평 규모의 대대적인 공원을 만들고 한양공원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남산의 북쪽 기슭을 그들의 휴식처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나라 잃은 임금 고종에게 그 표지석의 이름을 쓰라고 했다니, 그들은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가? 망국의 왕은 그곳이 종주국의 식민지 거류민을 위한 공원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왜인들은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결국 고종은 을사늑약 때처럼 하릴없이 굴복하였다. 이미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폐왕은 왜 끝까지 그들의 치욕적인 강요를 거절하지 못했을까? 부끄럽지만, 그것이 조선왕의 진면모였을지도 모른다.

▲ 한양공원

 

오후 1시가 훨씬 지나 남산케이블카 시발점에 모여 시내로 내려왔다. 부산항활어집이라는 한식당에 점심식사를 예약했다고 한다. 신세계백화점이 대각선으로 가깝게 바라보이는 식당이었다. 대략 3~4km를 떠들며 걸었더니 배가 고팠다. 큰 식당은 아니었지만, 오붓했다. 나는 갈비탕 아니면 전주비빔밥같은 비교적 저렴한 식사를 선호했지만, 대다수의 동료들이 맛있고 배부른 것으로 하자고 하여 나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 종업원이 권하는 식사는 낮정식이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낯 설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웬걸, 수시로 나오는 음식이 무려 10여 가지는 됨직하였다. 각종 봄나물이며 전, 튀김, 회덮밥, 생선회, 생선구이, 해물탕, 조개류 등 나중에는 배가 불러 음식을 남겼다.

동료들 사이에 덕담이 오가고 농담이 때로는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예를 들면 ‘분당 사는 아무개 여성 동지는 왜 허 아무개 통신원을 보러오지 않았나?’ 하는 등의 순박한 농담이 오갔다. 흔히들 초등학교 상급학년 때 나눴던 농담과 같은 것이었다. 농담이 오가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우리들은 마냥 동심으로 돌아갔다. 노년들의 얼굴에도 순진무구한 우정이 찾아들었다. 양성숙 편집위원만은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났다. 집에 갈 시간이다.

“모두들 오늘 저녁에는 20대 국회의원 개표실황을 보느라 늦잠을 자겠네요.” 음식점을 나오면서 이동구 팀장이 말했다.

사진 : 박효삼 편집위원, 권용동 주주통신원, 양성숙 편집위원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허창무 주주통산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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