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마루에서 청운대까지 동쪽으로 내려가다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 전체 공사구간을 지방 군현의 수만큼 97로 나누고, 공사구간의 기점을 백악마루에서 天(천)자로 시작했다. 끝나는 지점은 97번째의 弔(조)자 구간으로 그 역시 백악산에서 끝나도록 했다. 성곽탐방로도 그 궤도를 따라갈 것이다. 시계 진행방향이다. 

 1‧21사태 소나무
 백악마루에서 동쪽 청운대로 내려가면 1‧21사태의 증인처럼 서있는 소나무를 만난다. 수령이 약 200년 정도 된 큰 소나무인데,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다. 표지판에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령 200년 된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았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 이 총탄자국은 우리 군경과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교전한 흔적이다. 그때 군경은 현장으로 출동하여 28명을 사살했다. 1명은 도주했다. 생포한 한 사람은 김신조(金新朝)인데, 그는 그 후 한국으로 귀순했다.

▲ 1․21사태 소나무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강북인구를 강남으로  이주시키는 강남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또 한편 청와대 뒤편이기 때문에 개발을 억제했던 평창동 지역을 개발하도록 허용했다. 인가와 건물이 없어 공비들이 침입하기에 유리했던 사정을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북한산국립공원지역을 해제하여 택지로 분양하기 시작했다. 부자들은 그때까지 오염되지 않고 경관이 빼어난 평창으로 몰려들어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평창동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야금야금 산자락을 파고들어가 수려했던 북한산 경치를 많이 훼손하고 말았다.

평창동(平倉洞)의 이름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조선시대 지금 평창동지역에는 선혜청(宣惠廳) 부속창고인 평창(平倉)이 있었다. 평창동은 거기서 유래한 동네이다.

 백악산의 각자성석
 1‧21사태 소나무를 지나 청운대에 도착하기 직전 왼쪽으로 각자성석이 보인다. 그곳 성벽에는 ‘嘉慶九年(가경구년) 甲子十月日(갑자시월일) 牌將(패장) 吳再敏(오재민) 監官(감관) 李東翰(이동한) 邊手(변수) 龍聖輝(용성휘)’라는 한자가 새겨져있다. 가경구년은 청나라의 연호로 조선 왕의 연도로 환산하면 순조 4년(1804)에 해당한다. 패장은 단위부대의 지휘자로 당시 도성수축 공사를 관리했고, 감관은 그 공사를 감독한 관리였다. 변수는 목수 및 석수 등 기술자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는 것은 이미 낙산구간 해설에서도 언급했다. 이처럼 국가적인 대토목공사의 공사실명제는 백악구간에서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 백악산의 각자성석, 청운대 도착 전 왼쪽 성벽에 있다.

 청운대(靑雲臺)
 각자성석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쉬어가기 좋은 곳이 나온다. 푸른 하늘에 뜬 흰 구름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라는 뜻일까? 아무튼 정설은 없지만, 이곳에서 조망하는 경치는 다양하다. 조선시대 순성장거를 했던 사람들도 여기서 쉬며 가져온 음식으로 시장기를 달랬을 것이다. 백악마루의 높이가 342m이고, 청운대 해발고도가 293m이니 청운대는 백악마루보다 약 50m 아래에 위치한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는 경복궁과 광화문의 남쪽으로 뻗은 육조대로(六曹大路: 세종로)를 일직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인왕산 주봉들, 우로부터 벽련봉, 낙월봉, 주홀봉 등이 보이고, 성곽이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으로 인왕산 동쪽을 기어오르고 있다.

백악산은 법궁인 경복궁의 주산이지만,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태조실록’에도 백악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경복궁이 임좌병향(壬坐丙向)하여 자리 잡았다.”고 기록했다. 이를테면 경복궁은 백악산의 정남이 아니라 남동쪽으로 15〬 방향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백악산의 정상이 아니라 동쪽으로 좀 내려온 자리에서 보아야 일직선이 된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청운대이다. 그에 따라 광화문도 세종로, 즉 옛 육조거리와 일직선을 이루지 않는다. 세종로는 광화문에서 11시 방향으로 뻗어있다.

청운대에서는 성 밖 북쪽으로 돌출한 곡성(曲城)이며, 여름철 숲이 우거진 계절이 아니면 보이는 촛대바위며, 오른쪽 능선에 약간 튀어나온 부아암(負兒岩)이 보인다. 해태바위라고도 부르는 부아암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인데, 겸재 정선은 이 바위를 보고 ‘부아암도(負兒岩圖)’를 그렸다. 부아암과 같은 바위 모양은 한반도의 기후가 고온다습했을 때 심층풍화작용(深層風化作用 : deep weathering)의 결과로 생긴 것이다.

▲ 정선 '백악부아암도'

글 : 허창무 주주통신원, 사진 : 이동구 에디터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허창무 주주통신원  sdm3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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